환상 과학 소설 천년 女皇 (상) - 박경범 저 ----- 차 례 ----- <작가 소개> <작가의 서문> <작가의 의도> <주요 캐릭터 소개> <이 책을 잘 읽는 법> <기록자의 서문> - 제 1 부 - (1) 아림의 情事 (2) 심문 받는 아림 (3) 女皇 貴順摩耶姬姑 (4) 熙永 大始女皇 (5) 正史와 野史 (6) 새 시대의 개막 (7) 女皇族의 융성 - 제 2 부 - (8) 北國의 女皇 (9) 女皇族 자매 (10) 東方 遠征 (11) 大平原의 건국 <작가 소개> 박경범 서울 아현동 출생. 서울대학교 졸업 후 정보통신 관련 연구기관, 대기업 등에 근무했다. 컴퓨터를 통한 인간의 문화생활의 향상에 뜻을 두어, 국내 최초로 음성, 음악, 그림 그리고 시(詩)를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컴퓨터 소리시집>을 기획 개발하여 발표했다. 그리고 연구기관 재직 때의 경험을 토대로 컴퓨터에 의한 음성정보처리기법을 국내 최초로 우리말 용어를 사용하여 쓴 전문 기술서적 <선형예측분석법에 의한 음성의 압축과 재생>을 저술했다. 학생 때부터 원고지, 편지지 등에 틈틈이 자신의 글을 써 오다가 94년부터 하이텔(muma)과 천리안(kbpark)에서 문예활동을 시작하여 여러 단편소설과 수필을 발표했다. 95년 전반기 하이텔 이용자 문학상에 단편 과학소설 <외계인 X>가 당선되어 이제까지는 없던 전혀 새로운 경향의 문학을 선보였다. <작가의 서문> 근 일년에 걸친 정리작업이 끝났다.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썼는지 의아하게도 느껴진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이미 이야기의 몇몇 편린 들은 미리부터 내 주위를 맴돌아왔다. 이야기가 만들어지지 오래 전에도, 숱한 장면들은 내게 근거 모르게 나타나곤 했던 것이다. 그 동안 주위를 맴돌던, <기록자>와의 만남에 의해 이제 비로소 이야기가 엮어졌나 한다. 이곳에 지금 사는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라 해서 우리와 먼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그대로 지금의 우리 인간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정신은 그 담아내는 그릇이 달라질 뿐 이 세상이 지속되는 한 영원히 이어가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작가의 의도> 근래에 미래의 인간상을 그린 과학소설을 쓰고자 하면서 또한 빈번히 거론되는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여성의 생육의 일이 그대로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 여성이 진정한 힘을 가질 수 있는 확실한 답안이 될 것이라는 답안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민족과 인종의 생성과 발전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도 표함하고 의도적인 과학관련 소재 보다는 자연과학적인 사고방식이 글의 바탕에 깔려 있는 과학소설의 한 유형을 실험하고자 했다. 기발한 착상의 미래 에스에프라기보다는 인간이 가지는 각 면모를 구체화시킨 상징소설에 더 비중이 두어지길 바란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도움 주신 모든 분들께 일일이 감사드리는 구절을 생략해야 하겠다. 사실 감사를 드리자면 내가 그 동안 살아오면서 이용해 왔던 건물, 차량 등의 모든 시설, 제작물들을 안전에 문제없이 만들고 운용해주어 내가 이제 무사히 이 이야기를 정리할 수 있게끔 해 준 모든 분들에게까지 감사드려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주요 캐릭터 소개> 貴順摩耶姬姑(女皇族) 생명가치의 구현 그것만을 위해 진화된 여황족의 후예로서 여황족 하나는 곧 한 민족이나 나라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귀순마야희고는 우리의 전통여신 摩姑에서 따온 이름으로서 한민족 시조여신을 상징한다. 여황족은 태어난 많은 아이 중에서 젖을 먹고 자라는 아이로서 선택됨으로써 자라난다. 초기에는 현생인류(소설 안에서는 전생인류)와 마찬가지로 성장한다. 그러나 풍만한 성인여성의 몸을 이룬 후에도 그 모습은 늙지 않고 계속 성장하여 凡人族(여황족 이외의 모든 사람)의 키의 네 배까지 성장한다. 그리하여 한 배에 많은 아기를 출산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몸이 큰데 반해 몸 전체의 생김새와 구조는 그저 현생인류의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으로만 있기 때문에 원활한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어 웬만한 모든 일상사는 일사람의 시중을 받아야만 한다. 그 외 전반적인 면에서는 초월적인 강한 생명력을 갖고 있으며 천년을 가까이 산다. 아림(일사람) 일사람은 근본은 여성이지만 생식을 위한 몸의 모든 부수적 기능이 생략되고 오로지 활동의 효율성을 위해 진화한 형태이다. 그 일 처리 능력의 효율성과 뛰어남은 전생인류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나 자기의 맡은 일 이외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아림은 출생시의 곡절로 인해 약간의 성욕을 지닌 일사람이 되어 여황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사람과 숫사람의 정분 사건을 일으키고 만다. 희영(전생인류, 후천개벽의 시조) 인류의 출산이 자동화 된 미래사회에서 이러한 비인간적인 체제를 타파하고 스스로 한 몸으로 자식생산을 전담하고 다른 뭇 여성들은 계속해서 자아실현에 매진하게끔 하여 새로운 인류생활양식의 시대 즉 후천개벽을 연 시조여성. 正史에서는 모든 면에 뛰어난 초월적인 여자가 모든 여성들의 추대를 받아 여왕으로 옹립되며 野史에서는 출산 자동화 시설 운용을 담당하는 한 여자가 자기의 출산기능을 복원시키고 기계출산시스템을 파괴하여 왕위에 오른다. 강쇠(숫사람) 오로지 생식의 기능만이 발달하였으며 그 이외의 모든 일에는 관심이 없는 숫사람의 하나. <이 책을 잘 읽는 법> 1. 낱말의 뜻을 그 자체로서 새기고 現世의 관습적 의미를 두지 않는다. 이를테면 빈번히 사용되는 '生産'이라는 말은 '중전께서 元子 아기씨를 생산하셨다.'에서 쓰이는 뜻과 같은 의미이지 현대의 공장물품 생산의 의미가 아니다. 2. 話者의 발설에 굳이 무슨 의도나 주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의미의 해석은 독자의 몫일 뿐이다. 3. 가다가 혹 의미를 알기 힘든 어휘나 造語가 있으면 일단 그냥 지나친다. 初讀에서는 그저 재미를 느낄 수 있다면 기쁘겠고 하나하나의 완전한 의미는 나중에라도 '그게 그런 뜻이었구나!' 하고 알게 된다면 영광으로 생각한다. 4. 人名은 사건의 무대가 되는 지방의 통상적인 사람의 이름들을 썼다. 특히 여황족의 이름은 그 지방의 보편적인 여자 이름과 女神의 이름을 조합했다. 5. 여기서 나오는 先天, 後天의 말은 동양의 우주관인 元會運世의 우주관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지구가 일년을 단위로 춘하추동의 변화가 반복하듯이 우주도 지구의 약 십만 년에 해당하는 시간을 단위로 四時변화를 하는데 이 중 봄과 여름을 선천이라 하고 가을과 겨울을 후천이라 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증산도 관련 서적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6. 본서는 일본 수출 등을 염두에 두고 재작성한 것이기 때문에 본문에 노출 한자가 많이 있는 부분이 있다. '아래아 한글'에서 한자 위에서 F9를 치든가 혹은 한 영역을 F3으로 마킹해서 F9를 치면 한글로 변환하여 읽을 수 있다. <기록자의 서문> 우주의 여행자들 사이에는 알려진 바 가장 생명의 기운이 넘치는 한 푸르른 행성의 널리 사는 무리의 한 이야기가 시공(時空)을 넘나들어 전해 내려오고 있어, 나는 이를 받아 기록하여 우주 오지(奧地)의 모든 이들에게까지도 전하고자 한다. 나는 그 구구절절 맺힌 사연들의 애초 가진 의미를 남김없이 통할 수 있도록 힘써 보았다. 그러나, 우주공용어의 극히 섬세한 본뜻을 말끝이 무딘 국지어(局地語)를 써서 온전히 나타내기란 세제곱 입방 공간에서 항성간을 여행하려 함과 같이 무모하기만 한 것이었다. 때문에 기록의 정리를 마친 지금도 미진한 마음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게다가 그 이야기를 가장 잘 안다기에 내가 찾아내 한사코 붙들어 말을 들었던 자는, 하필이면 그 심성이 지극히 심약하고 중심이 없어 한참동안 이야기를 늘어 놓다가도 결정적 순간마다에는 가슴이 메어지는 듯하며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를 달래어 억지로 말을 끄집어 내고, 농을 걸어 마음을 가벼이 하여 주변얘기라도 이어가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 또한 위인(爲人)이 우유부단하기 짝이 없어, 그가 한사코 자기의 감정에 빠져 있으면 덩달아 그의 분위기에 휩싸여들고 마니, 끝끝내 그의 아는 모든 것을 캐내기란 불가능했다. 기실 그가 알고있는 애끊는 사연의 본말을 속속들이 알기에는 스며오는 두려움이 적지 않았으니 위인이 어찌 한심스럽다 아니할 수 있을까. 이런 저런 까닭으로 인해 있었던 이야기 중에 빠지거나 대충만 남은 것이 숱하나 기록된 모든 것은 있는 사실이고 없는 사실을 올려 놓지는 않았으며 차후라도 기록을 더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더하리라 마음두고 있다. 나는 앞으로 이 이야기를 우주 각 곳을 돌며 만나는 자마다 붙잡고서는 그가 듣기를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기어이 들려주려 한다. 이제 이 일만은 그저 과단성 있게 힘써 해나가기를 마음먹으니, 그리하여 그가 이야기를 다 들은 그 날에는, 밤을 도와 마음의 충격을 진정하면서 감흥에 젖은 뒤에, 이후 다음날 아침부터는 한결 진지하고 현명한 자가 된다면 더없이 기쁠 따름이다. 그 곳은 그 푸른 곳 중에서도 철따라 오색꽃 만발하며 색다른 향기를 누리에 번지게 하고, 화창한날 뽀얀 날 비긋는 날 눈 소복한 날이 고루고루 돌아 나오니 사는 이들 마음 또한 다정다감하며 온화 유순할 수밖에 없는 곳이라 한다. 도처를 감돌아 흐르는 강줄기는 삶의 보금자리를 등 굽혀 감싸 보듬은 모체로부터 나오는 쉬임 없는 젖줄기인 양 하니 우주방랑자의 떠도는 영혼이라도 지나치다 그곳을 알게 된다면 서둘러 머물고자 마음 먹게끔 하는 곳이라더라. 이 곳에 살아오고 지고 하던 하많은 인생들 다 저마다 깊고 서린 사연 있어 그네들 이야기 모두가 하나하나 심금 울릴 얘깃거리 될 수 있으나 그 중 우주일년의 선천과 후천을 두루 뒤집어 살펴 가장 기구한 이야기가 있으니 바로 이네들에게서 후천 시대에서는 개국의 시조며 선천시대에서는 전설의 여신(女神)되는 마고(摩姑)에 얽힌 이야기라. 해동(海東) 아사녀국 국태조(國太祖) 귀순마야희고는 여황족 계보로 보아 후천의 개벽시조로부터 제 123대 손으로서, 천성의 지선(至善)함이 그녀의 영지(領地) 곳곳에 배어들어 인간사(人間史) 이래로 드문 만큼의 복된 나라를 이루고 살았다고들 한다. 그녀가 그녀의 나라를 세우기까지의 모든 겪어온 일도 그러하지만 그녀가 나라를 이룩하고 난 뒤에도 애틋한 심정의 얽힘은 끊이지 않았으니 앞으로 풀어나가는 이야기는 그녀의 나라에서 일어난 일과 또한 그녀의 나라가 세워지기까지의 있었던 일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여 전하고자 하는 것이다. - 제 1 부 - (1) 아림의 情事 우주의 영원 속에 인간은 한 순간의 섬광에 불과한 것인가. 시간의 흐름 속에 인간의 존재는 다하고 마는 것인가. 우주의 四時 변화를 따라 먼 옛날에도 먼 훗날에도 이제와 다른 인간 삶이 있어라. 여기 우주일년의 벽을 넘어 인간의 순환을 말하는 기록이 있으니 이는 先天의 인간들에게 다가올 後天을 예고함이요 또한 前年의 후천도 이야기 함이라. 광혜 250년, 곧 아사녀 황국의 女皇 귀순마야희고가 그녀의 백성과 함께 대륙의 서북방으로부터 산맥과 호수와 사막을 가로질러, 이 곳 대륙의 동녘 끝 반도에 그녀의 새로운 나라를 세워 자리한 지 250년. 이 해 女皇국의 가을도 머나먼 옛 전생인류 시절의 가을처럼 쌀쌀한 바람과 뒹구는 낙엽은 변함이 없었다. 태양도 태고 적과 다름없이 女皇국의 온 낮을 비추다 귀순마야희고의 두고 온 고향이 아득히 멀리 있는 서쪽으로 기울어 자취를 감추고, 대지에는 어둠이 내리 깔렸다. 학부대신 아림은 오늘도 어김없이 조정의 일과를 마치고, 다른 대신들과 뭇 궁중사람들의 눈을 피해 숫사람 강쇠의 침소가 있는 내전으로 찾아들었다. 주위에는 억만년을 변치 않고 예와 같이 한결같은 귀뚜라미의 울음 소리만이 간단없이 들릴 뿐이었다. 그녀는 내전 숫사람 거처의 맨 구석에 있는 강쇠의 침소를 찾아 그 앞에 섰다. 문 바른 한지에는 희미한 인영(人影)이 비치고 있었다. 잠시 몸을 추스린 그녀는 가만히 손을 내밀어 문살을 살짝 잡아 흔들었다. "강쇠 게 있느냐? 나 아림이다." 여느 일사람 마냥 명확한 의미를 알아듣기에 알맞은 주파수의 차갑고 날카로운 금속성의 목소리를 내는 그녀이지만, 낮 동안의 분주한 소음이 걷혀지고 난 후 적막한 야경을 뒤에 깔고 침소 문 앞에서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는 관현악의 대합주가 지난 뒤 침묵 속에서의 심벌즈의 울림과 같이 영롱하게 울렸다. "예 어서 들어오십시오." 굵고 칙칙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전생인류의 여느 남자의 소리와 비슷하면서도 무언가 알맹이가 빠진 듯 푸석한 껍질만의 소리 같았다. 강쇠는 오늘도 어김없는 아림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오늘따라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내전 숫사람 처소에 요즘 들어 이전에는 없던 別氣가 풍긴다는 소문이 나돌아 황공하게도 어질기 이를 데 없는 귀순 女皇폐하의 귓전에까지도 전해졌으며, 이에 따라 女皇국의 守勢를 담당하는 軍部大臣 새라를 비롯한 女皇국의 모든 치안담당관들이 바싹 긴장하고 궐 안 곳곳의 순찰을 강화하고 있는 터 였다. 방안의 은은한 조명아래, 미닫이문을 자신의 좁은 어깨 만큼만 살짝 열고, 바깥 세상이 방안으로 토해내는 무엇인 마냥 얼른 들어선 아림의 모습이 드러났다. 머리칼은 전생인류 시대에 흔히들 얘기하는 단발머리의 모습이었다. 그것은 머리칼을 잘라서가 아니라 그 이상은 자라지 않아서였다. 머리부분을 보호하기 위한 정도만큼 이상은 활동에 불편하기 때문이다. 갸름하고 창백한 얼굴의 이목구비는 전생인류의 10세 가량 된 여아의 모습과 비슷하나, 눈빛은 인생의 풍상을 겪은 우수가 어렸고 이제 중년에 접어든 그녀의 나이에 따라 잔주름이 눈가에 패어 있었다. "오시는 길에 별다른 것은 일은 없었습니까? 이 즈음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산발한 더벅머리에 짙은 혈색 낀 얼굴의 강쇠가 그녀를 맞았다. 초점 없는 눈에 헤벌어진 입은 그가 평소에도 無念頭의 낮 생활과 無思索의 밤시간을 보내며 慣性의 삶을 보냄을 알 수 있게 했다. 강쇠의 방에는 침상 하나와 구석에 조그마한 사물함과 전자오락기가 있을 뿐이었다. "별 일 있겠느냐. 어느 누가 나의 일을 꿈에라도 생각 해 보았겠느냐?" 아림은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대답을 했지만 실상 요즘 궁중의 경계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은 그녀가 더 잘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욕구는 하루를 멀다하고 나날이 더해가기만 하니 그런 불안감도 그녀의 정사를 마다히 할 수는 없었다. 사실 그녀가 낮의 일과 시간 동안에라도 그녀의 욕구를 자제할 수 있었던 것만 해도 매우 다행스럽다 여겨질 정도였다. 그녀의 활화산 같은 욕구는 이미 그녀 자신의 높은 지적 성취에 수반되는 이성의 힘으로써도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마주선 아림은 왼손을 가만히 들어 강쇠의 어깨를 짚었다. 그리고는 오른 팔을 내밀어 그를 휘감아 안고는 끌어안을 듯이 당겼다. 그 상태에서 둘이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옆에 놓인 나지막한 침상 위로 스르르 무너지듯이 주저앉았다. 촉촉히 냉기 어린 아림의 입술에서는 따스하면서도 서늘한 기운의 입김이 내뿜어졌다. 다시 그녀의 두 손은 강쇠의 웃옷자락을 파 짚어 젖혀 넘겼다. 그리고는 양팔에 더욱 힘을 주어 그의 가슴을 세게 끌어안았다. 아림에 의해 이탈된 강쇠의 베 잠방이는 구석으로 던져졌다. 눕혀진 강쇠의 위에서 잠시 자세를 올린 아림도 자신의 관복의 옷고름을 풀었다. 방안의 불빛은 꺼졌다. 그러자 바깥의 곳곳에 놓인 石燈으로부터의 밤 조명 빛이 온 방문을 비추어 은은하고 부드러운 微光을 방안에 뿌렸다. 문살 그림자의 사이사이에 희게 빛나는 한지를 투과해온 미광의 빛살은 아림의 허리 윤곽선에 닿아 미끄러져 내렸다. 그녀의 몸의 움직임에 따라 어둠 속에 굽이치는 빛의 완만한 폭포가 일었다. 아림은 다시 자세를 내렸다. 늦가을 쌀쌀한 바람을 맞아 냉각될 대로 냉각된 아림의 안면이 진종일의 낮잠과 뒤척거림으로 냉각의 기회를 갖지 못하고 응축된 체열이 그대로 남아 있는 강쇠의 가슴에 닿았다. 양자는 갑작스레 온기와 냉기가 교차되는 섬뜩함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얼굴과 얼굴이 맞닿도록 아림은 강쇠의 몸 위를 올라갔다. 그녀의 하체를 들어 강쇠의 하체부와 맞닿아 접합 가능토록 위치시켰다. 그 상태에서 그녀는 가만히 하강해 내려 앉았다. 다시 상승이 있고 나서 하강이 있었다. 두 상태의 상호 뒤바뀜은 시간이 감에 따라 더욱 빈번해져 갔다. 양자의 흥분은 고조되어 강쇠도 아림의 몸을 세게 끌어안았다. 한동안을 그들은 서로를 껴안으며 침상에서 뒤척였다. 위에 있던 아림은 어느 틈엔가 아래로 와 있었다. 어찌할 바를 찾기가 익숙지 않은 듯한 강쇠에 비해 아림은 아래쪽에 있으면서도 더욱 강한 열의를 보이는 것 같았다. 그녀의 허리와 하체부는 계속 긴장과 이완을 반복했다. 비록 어색한 감은 있었으나 그들이 서로의 기분에 빠져듦은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아림의 하반신 전반에 걸쳐 표출되는 격렬한 긴장과 이완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점점 더 가빠졌다. 그 빨라진 만큼 빨라져감도 더해갔다. 급기야는 그녀의 몸 전체가 그대로 심장의 박동을 따르는 듯 몸 전체에 맥박이 크게 뛰는 마냥으로 보였다. 그녀의 격렬한 움직임이 고비에 이르는 듯하여 아림은 마냥 더해갔던 狀遷移 반복의 속도를 급격히 낮추더니만 가만히 강쇠에게 속삭였다. "강쇠야, 내가 이런 감을 그대로 느낄 수 있도록 네가 움직여 보려무나." 몸의 움직임은 늦추어 졌으나 아직 그녀의 심장고동의 속도와 허파호흡의 속도는 조금도 늦춰지지 않아서인지 그녀의 말소리는 이기지 못할 반복성의 주기적 힘에 의해 군데군데 끊기면서 가슴 차게 헐떡였다. 강쇠는 아림의 말을 따랐다. 서로의 움직임의 동력원은 변하였으나 양인의 몸 상호간의 근거리 왕복작용은 다시 그대로 계속되었다. 그들의 이러한 행위는 먼 옛날 인간이 다른 여느 동물과 마찬가지로 암수의 쌍에 의한 양성생식으로 자손을 번식시켰던 때라면 지극히 당연한 한 일상사에 불과할 것이다. 상황 전환의 저조기를 틈타 아림은 강쇠에게 말을 건넸다. "곧 차년도 일사분기 출산을 위한 受精式 날짜가 다가오는데 강쇠 너는 어찌 될 것 같으냐?" "이번에도 우량 종자로 선택될 가능성은 어려워졌어요. 길동이가 아마 택해질 것 같아요. 이제 점점 나이도 들어가니 앞으로는 더욱 가망이 없겠지요. 제 인생도 이걸로 다하는 것 같아요." "너희들 밤낮 그러한 생활만을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 매일같이 폐하의 부름만 기다리다가, 일 끝나면 내쫓기고, 늙으면 버려지고... 이런 신세로부터 벗어날 생각은 안 해봤니? 기회를 보아 나와 함께 멀리 도망치자." "에구, 그런 말씀 더 하지 마세요. 저희들이 살려면 여기 말고 어디가 있겠습니까?" 강쇠는 대답했다. 그들 숫사람은 생식을 위한 수정작업 이외에는 달리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몸을 쓰는 일에는 그들의 무딘 감각으로는 당대의 섬세한 손놀림이 필요한 기기 조작에 적응하지 못하고 머리를 쓰는 일에는 조금만 뇌에 부담 주는 골치 아픈 글이나 상황을 접하면 이내 과부하 현상을 일으키고 정신이 혼미해지고 마는 것이 그들이었다. 그들이 생식행위 이외에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혼자서는 쉴 새 없는 반복 손동작이 요구되는 전자오락 게임기를 열심히 두드리는 것이고 두셋 이상이 모이면 내기 도박인 片紙 놀음을 밤새껏 할 수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들은 이십 세가 넘어 육체적 가치의 하향선을 그리는 시기가 되면, 궁궐 당국으로부터의 그들에 대한 대접이 눈에 띠게 급격히 소홀해져 대개의 경우 이 시기에 이런저런 병을 얻어 죽기 일쑤지만, 간혹 살아남는 자도 더이상 女皇의 부름이 없게 됨에 따라 얼마 안 가 순순히 국가제도에 의한 안락사를 받아들인다. 그들의 수명은 채 삼사십 세를 넘지 못하는 것이다. 강쇠가 주도하면서 점차 다시 속력이 더해 가는 듯 하자 아림은 자신감을 갖는 듯 강쇠에게 물었다. "강쇠야 기분이 어떠냐?" "예 이제까지는 느껴보지 못한 것입니다요. 폐하와의 수정식 때에는 폐하의 女香에 취해 정신없이 射精을 했던 것으로 기억나는데 아림님을 안아 보는 기분은 이제까지는 모르던 것입니다. 단지 폐하와 같이 있을 때처럼 폐하의 그 아름다운 聖體를 즐기지 못하는 것이 흠이지만." "하하. 내 비록 폐하의 성체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몸이긴 하지만, 나는 너 하나만의 것이질 않느냐?" 계속 둘은 엎치락뒤치락 저희들끼리의 悅樂을 즐겼다. 적은 힘을 쓰고서도 성행위를 할 수 있기에 女皇과의 수정식 때와는 달리 상당 시간 즐길 수 있다는 것도 숫사람 강쇠가 느낀 새로운 매력이었다. 또한 이제까지의 廣幅한 吸入口에 대한 放射가 아닌, 뻑뻑한 凹凸의 맞물림 속에서의 마찰감과 윤활감도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강쇠도 분위기에 더욱 빠져들었는지 몸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강해졌다. 양팔은 더욱 거세게 아림을 끌어안았다. 땀에 젖은 양인의 몸은 애초에 가졌던 촉감의 교환을 더이상 갖지 못하고 미끈미끈한 液感의 공유가 주류를 이루었다. 양인의 체온도 공히 상한치에 가까워졌다. 그러다 아림은 상위로 자리바꿈을 하더니 잠시 강쇠의 몸을 잡아 누르면서 행위의 가속진행을 완화시켰다. 황홀경을 넘나드는 이 긴장이 급작스레 풀어질 위험을 막고 가만가만 늦췄다 조였다 하며 가능한 최장으로 연장하려 함이었다. 그리고 간간이 여유를 갖고 마음을 가다듬어 이 신묘한 감흥을 재차 또 재차 더욱 깊이 느끼기 위한 예비충전의 시간을 가지려 함이었다. 흥분의 고조가 마냥의 상승세에서 주춤거리자 강쇠는 잠시 어리둥절했으나, 그를 붙잡고 있으면서 어둠 속 정면으로 찬찬히 올려보는 아림의 발그레히 상기된 얼굴에서, 고혹적으로 빛나는 눈동자는 순간적으로 긴장을 더해 주어, 육체적 이완의 막간을 메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가 멈춰지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단지 극치를 향하여 무작정으로 치달아 넘어가지 않고 그 주위를 좀처럼 떠나지 않겠다는 듯 넘나들며 맴도는 것이라고나 할까. 아림의 속삭임은 다시 방안의 어둠과 고요 속에 울려 퍼졌다. "강쇠야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안타깝다. 나와 같이 아예 이 나라 밖으로 탈출하자. 곧 퇴역예정인 중고 군함 한 척이 있으니 이것을 민간에 불하하려 하는 척하면서 몰래 타고 가면 돼. 사람이라고는 전혀 없는 저 먼 곳 바다 한가운데의 섬이면 좋을 거야. 아니면 아예 우주선을 타고 달로 가서 한 구석에 숨어살든지, 사람들이 찾아오는 기간은 얼마 안되니까 그렇게 큰 불편은 없을 거야. 비록 살기는 어렵다 해도 거기에서 우리끼리 서로를 아끼는 마음으로 살면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을 거야. 너도 적어도 내가 살 동안은 살 수 있도록 해 줄 수 있어." 강쇠는 말을 알아듣는지 아닌지 무심코 정사에만 열중했다. 그에게 있어 앞으로의 생활을 심사숙고해 본다는 것은 심히 부담 가는 일이다. 밤하늘에는 아림의 가느다란 숨소리와 콧소리가 퍼졌다. 그러나 툇마루 밑 주춧돌 옆의 벌레소리나 지붕 위의 가을바람 스치는 소리보다 크지는 않았다. 이 때, 바깥으로부터 살금살금 가까워 오는 그림자의 한 무리가 있었다. 그들은 곧 강쇠의 처소를 에워쌌다. 다시 한 동안의 적막이 흘렀다. 이윽고, 고요한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강한 금속성의 怪鳥音의 목소리가 귀청을 찔렀다. "저 반역의 연놈들을 체포하라!" 예닐곱의 날씬하고 가뿐한 몸매의 黑衣人들이 강쇠의 처소의 문을 박살내고 들이닥쳤다. 그들은 강쇠에게는 냅다 발길질을 하여 구석에 몰아붙여 꼼짝달싹 못하고 떨게 놔두고는 아림을 미처 일어날 틈도 주지 않고 삽시간에 포박했다. 細長形의 몸을 가진 그들이었지만 그들의 동작은 힘이 넘쳤으며, 팔다리의 절도 있고 용의주도한 움직임은 자동화기계의 쇠 파이프마냥 빈틈없이 완벽했다. 최근의 심상찮은 소문에 女皇국 군부대신 새라가 자신의 정예요원들을 인솔해 궁궐 곳곳을 수색하던 중, 마침내 女皇폐하가 잠드신 이 밤중에는 응당 활동의 기미가 없어 마땅할 이 곳 숫사람 처소에서의 수상한 속삭임을 탐지해 현장을 덮친 것이었다. 큰 키에, 넓지는 않으나 탄탄하게 벌어진 어깨의 당당한 체구의 새라는 붉은 색이 주류을 이루는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붉은 빛을 띠면서 전생인류의 미소년의 인상이었다. 빛나는 눈빛을 수반한 시선은 매우 날카로워, 마주치는 자가 있다면 누구라도 그 기세를 꺾기에 충분했다. 손에 잡은 장검은 군 수뇌부의 병기로서 그녀의 위용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끌려나온 아림을 본 새라는 나체인 채로 묶여 있는 아림의 가슴이 여느 일사람들과는 달리 큰 젖꼭지가 달리고 젖무덤이 봉긋이 솟아있는 것을 보고는 충격을 받았다. 도대체 이 자는 어떻게 생겨난 자인가. 어서 진상을 알아내어 단호한 조치를 취하도록 해야 하겠다. 일사람의 신분으로서 어찌 숫사람과 더불어 이해 못할 행동을 하며, 그러잖아도 평소에도 얼굴이 발개지거나 눈물을 흘리는 등 가끔씩 무엄하게도 만인의 지존 귀순 女皇폐하를 흉내내곤 했는데 몸에서도 유사특질이 나타나곤 하니, 알지 못할 불안감까지도 엄습했다. "역시 너였구나. 밤마다 내전에 잠입해 불순한 행동을 한다는 자가." 平常의 톤으로 돌아온 목소리 였으나 如前히 銳强明瞭한 그녀의 소리는 서늘한 밤공기를 가만가만 자극하며 暗寂한 내전 마당에 내리 퍼졌다. 아림은 그간 女皇국의 학부대신으로 있으면서 나라에 작지 않은 공적을 하나 둘 쌓아올리고 그녀의 慧智를 인정받아, 최근에 女皇은 아림의 맡은 바 영역이 아닌 국가 대소사마저 그녀에게 묻는 경우가 많았다. 새라는 이러한 아림에 대한 女皇의 총애를 질투하여 어찌하면 그녀의 허물을 찾아 그녀의 앞길을 막아 볼까 생각해 왔었는데 이제 그녀는 하나도 고민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아림은 지금 상황에서는 할 수 있는 말을 찾지 못함에 한동안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할 말은 이것뿐이었다. "나는 어차피 잡힌 몸이지만 저 강쇠는 아무것도 모르고 내가 하자는 대로 한 것뿐이니 용서해주길 바란다." 새라는 입가에 嘲笑를 띄우고는 對答했다. "걱정 마라. 저놈은 그냥 놔두어도 이제 얼마 살지도 못할 것이고 그냥 단순하게 너의 음모에 끌려 들어왔을 뿐임을 나도 잘 안다." 다시 그녀는 주변에 둘러서 있는 부하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얘들아, 저놈은 그냥 내버려두고 어서 이 자를 끌고 가자." 새라와 스무 명의 그녀의 精銳 部下들은 아림을 捕縛한 채로 끌고 軍營으로 向했다. 본디 活動을 할 必要가 없는 時間에는 죽은 듯이 깊은 잠만 자기 마련인 다른 숫사람 大部分 이 騷動을 알지는 못했다. 알 必要도 없을 뿐더러 設令 소리가 들려왔다 해도 生殖活動 以外 一切의 世上事에 無關心한 그들에게는 간밤의 개꿈 程度로나 느껴질 뿐이었다. 때아닌 騷亂에 暫時 울음을 멈추었던 귀뚜라미도 다시 울기 시작했다. 밤은 깊어 멀고 먼 前生人類 時代의 한 때에는 人間의 꿈과 憧憬의 對象이었다는, 그리고 女皇國 사람들에게는 人間事의 시름을 暫時 잊으려는 이들의 休養地인 달이 오늘도 어김없이 서럽고도 탐스러운 下弦月의 姿態로 東녘에 떠올랐다. 千年萬年 變치 않은 模襲의 기러기의 行列이 女皇國의 그날 밤에도,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無心하게 달 그림자를 만들며 하늘을 繡놓았다. (2) 심문 받는 아림 새라의 일행은 군영에 도착해 어느 조그만 네모진 단층건물 앞에 멈추었다. 이 건물은 바깥으로부터 곧바로 내려가는 계단에 달린 문이 오히려 정문인 듯 하고 건물 옆면의 지상에 나 있는 조그만 쇠쪽문은 녹슨 자물쇠로 항시 잠기어 있었다. 그들은 아림을 지하의 취조실로 끌고 갔다. 아림은 지하에 대기중인 부하들에게 넘겨졌다. 그리고는 곧 나가려는 새라에게 아림은 말했다. "옷이라도 다시 입게 해다오. 그렇게 급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 내가 어딜 도망칠 수도 없는 것 아니냐?" 아림의 푸른 관복은 부하들 중 하나가 수습해 가져 왔었다. 그러나 아림의 다른 소지품들과 함께 취조실 구석 탁자 위에 내던져 널려 있을 뿐이었다. "옷은 네가 그냥 벗고 싶어서 벗지 않았느냐? 어차피 내일이면 죄수복으로 갈아입을 것이니 오늘밤은 이대로 애들과 함께 지내보도록 해라." 새라는 이렇게 말하고는 부하들에게 알아들을 말 못 알아들을 말이 섞인 무언가 복잡한 내용의 지시를 챙겨주고는 계단을 올라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아림 대신님 이게 어찌된 일이옵니까?" 취조 담당원 중의 하나가 뜻밖의 아림의 입실에 말을 건넸다. 그러나 당장 아림이 대답할 말도 없을 뿐더러 그녀의 질문도 극히 의례적인 것에 불과했으므로 대화는 더 진행되지 않았다. 곧 그네들은 맡은 바 일의 지시 받은 대로의 실행에 들어갔다. 아림은 형틀에 묶였다. 형틀이라고 해야 그냥 의자의 모양에, 죄인의 손을 뒷짐을 지게해서 묶은 것뿐이었다. 죄인으로부터의 진술을 받아내기 위한 각종 도구들이 주변에 보였는데 그것은 전생인류 시대의 전반기에나 있었던 지극히 원시적인 도구들뿐이었다. 취조원들의 행동방식을 포함해서 죄인을 다루기 위한 모든 것은 원시상태 그대로였다. 아림이 겪는 모멸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바로 한 주 전만 해도 그녀는 내정순시 차 이곳을 방문해, 음지에서 고생하고 있는 이들이라 하여 그들을 격려하지 않았던가. 그 때에 그녀가 내미는 악수의 손길을 잡고 황송해 어찌할 바 모르던 그들에게 오늘 그녀는 발가벗겨진 채 묶이어 내맡겨지는 수모를 당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일부러 수모를 더 주려고 아림을 이 상태로 묶어 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이 죄인 아림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불필요한 과정없이 취조를 효율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아림에게는 이것이 몹시도 견디기 어려웠다. 그들의 말투는 일단 업무에 들어가자 갑자기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강쇠와는 언제부터 알고 지내왔느냐?" 아림이 묶여있는 곳에서 탁자를 건너 맞은 편에 앉아있는 자가 물었다. 그의 앞에는 약간의 메모를 위한 도구가 놓여 있었다. "그건 내 사생활인데 너희들이 무엇 하려고 알려 하느냐?" 아림은 힘없이 푸념하듯 말했다. 이 말에 취조원의 우두머리인 듯한 맞은편의 자는 아림을 보아 오른편에서 서서 대기하고 있는 자에게 고개를 살짝 돌리며 턱을 약간 들어 무언가의 신호를 했다. 곧 오른편의 자가 아림을 묶여있는 채로 걷어차 뒤로 넘어뜨렸다. "어서 바른 대로 대지 못할까?" 아림을 걷어찬 취조원은 소리쳤다. 체포과정을 통해 받은 정신적 충격과 압송과정에서 얻은 피로, 현재의 압박감과 초조함 등이 겹친 터라 아림은 이 충격에 곧 정신을 잃었다. 그러자 곧 이어 기다렸다는 듯이 반대편에서 대기하던 자가 구석의 세면대 옆의 물받이통에서 한 양동이의 물을 퍼다 아림에게 쏟아 부었다. 아림은 깨어났다. 그녀는 다시 일으켜 앉혀졌다. 상투적인 고전적 취조 양식을 그들은 계속했다. "강쇠를 처음 만난 것이 언제냐?" "지난해 봄 우량 種人 육성을 위한 학술발표대회 때 초청인사로 참석해 그때 종인 대표로 나와있는 그를 처음 보았어요." 이미 아림의 말투는 그들의 기세에 눌리어져 있었다. "그때 종인들은 학회 참석자들에게 實例로서 보여지고 난 뒤에 곧 돌려보내졌는데 어떻게 그와 이야기가 통하게 되었나?" 아림은 부끄러워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다시 그들의 기세가 험악해지는 듯 하자 서둘러 다시 진술했다. "그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내 마음이 흔들렸어요. 그의 품에 안겨 내 속마음을 이야기하고 싶었고 그의 품에서 하룻밤이라도 잠들고 싶었고..."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순순히 불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도무지 알지도 못할 소리나 지껄이고..." "철썩." 먼저 아림을 걷어찬 자가 크지는 않으나 강하게 단련된 티 나는 그녀의 오른손을 들어, 위에서 아래로 한차례 큰 반원을 그리며 아림의 면상을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이년이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정신이 돈 건지... 아니면 우리를 속이려고 일부러 미친 척 하는 건지..." "아냐 그럴 리가 없어 필시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게 있을 거야." "숨기는 게 아니에요. 내가 이제 무엇을 감추려 해봤자 무슨 소용이라고... 차근차근 내 얘기를 들어주세요." 얼마 전만 해도 까마득한 아랫사람이던 그들에게로의 아림의 호소는 좁은 지하 취조실 안에 애처롭게 울렸다. 취조원들도 이제는 조금 피곤해 졌는지 아림으로 하여금 그녀의 이야기를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아림의 이야기는 계속될 수 있었다. "그를 우량종인 연구를 위한 명목으로 내 연구실로 오게 했어요. 그러면서 그의 신체각부에 대한 분석의 명목으로 그의 몸 전체를 자세히 근접조사했고 나의 口腔과 觸手로 그의 상하주요부를 觸撫했어요. 처음에는 그는 얼떨떨해 하기만 하는 것 같다가 차츰 나의 행위에 익숙해져 가면서 색다른 맛을 느끼는 것 같았어요. 정해진 날짜가 다되고 그가 돌아가야 할 때가 되자 그도 아쉬워하는 기색이 보이길래 그의 처소를 알아두어 나중에 기회를 보아서 가 본다고 약속했어요. 작년까지만 해도 그는 여황폐하의 부르심을 자주 받았기에 나와 상봉할 기회가 많지 않았는데 올해 들어 부르심이 부쩍 줄어들자 나와 자주 만나게 되었어요." "주요부를 촉무하다니... 거기에 무엇을 숨겨 가져왔기 때문이 아니냐? 여황폐하와의 동침 시에 부근의 기밀문서나 가지고 오라고 우둔한 숫사람에게 밀명을 한 것 아니냐?" 본래에는 혈족의 分化로써만 계속 갈려나온 여황국들도 이제는 그 역사가 오래됨에 따라 혈연적으로 먼 국가가 인접한 곳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러한 국가끼리는 자연히 서로의 警戒가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니여요, 그냥 그 순간이 내게 기쁨을 주었기 때문이었어요." "이 년이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속이려 들고 있네." "퍽." 한차례의 加擊이 더해졌다. "청결해야할 구강과 촉수로 하체부를 촉무하다니... 지저분하기도 하군." "퉤, 그 입으로 밥을 먹다니..." 아림도 이제는 정말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 답답함을 더 이상 참지 못했는지 자신에게 오는 구타를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그는 내게 무언가 생명력이 들끓는 듯한 반액체를 주입했어요." "그것을 받으면서 나는 비로소 삶의 환희를 느꼈어요." 말로 해서는 더이상 안되겠다고 생각한 그들은 아림을 의자에서 풀어놓은 뒤 다시 탁자 위에다 침대에 누윈 마냥 눕혀놓고 팔다리를 묶었다. 그리고 이 자가 도대체 어떠한 밀서를 휴대했는가 엎어보고 돌려보고 하며 몸 구석구석을 샅샅이 살폈다. 그들은 그저 보다 치밀한 업무수행을 위해서였지만 아림은 또한층 더 이를 악무는 정신적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어떠한 색다른 수상한 소지품은 발견되지 않았다. 단지 몸이 여느 일사람보다 좀 부드럽고 가슴이 약간 솟아 나온 것 등이 달랐지만, 생체학적 지식이나 관심이 별반 없는 그들 취조원들로서는 그렇게 유의할 것이 되지 못했다. 그저 文弱한 자 특유의, 몸의 유약함 정도로 여겨질 뿐이었다. "야단났다. 이제까지도 아무런 단서를 잡지 못했는데... 내일 새라 대신님이 오시면 어찌 말해야하나." "할 수 없지. 이자는 본래 기억력은 뛰어날 테니까 숫사람으로부터 밤새 모든 정보를 캐내어 암기하고 있을 것이라고 보고해야지." 지치고 시달린 아림은 새벽이 가까워 오자 잠이 들었다. 그들도 더이상 아림을 가혹하게 다루지 않았다. 아니 근무시간이 끝나고 장소를 떠날 시간이 되자 그들은 아림을 구석의 침상에 들어 눕히고 찬 공기에 몸이 상할까 염려해 관복과 담요를 함께 덮어 주었다. 그러고는 이제까지 그들의 업무상 어쩔 수 없었던 행위가 심히 죄송스럽다는 듯이, 서로들 진지한 표정에 안쓰러운 눈으로 잠시 아림을 바라보고는 세 명의 파수병들만을 남기고 퇴근했다. 바깥의 하늘은 조금씩 푸른빛이 더해가고 있었다. 검푸른 하늘에 떠있던 하현월은 하늘 높이 떠올라 이제 창문 밖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늦가을의 찬바람이 더욱 쌀쌀한 새벽녘까지 아림은 피멍투성이가 된 채로 간간이 가느다란 신음을 내며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이윽고 날이 뿌여니 밝아지자 밖으로부터 네댓 명의 수감인 호송원들이, 찬서리에 젖은 아침 공기를 휘저으며 계단을 내려와 삐걱거리는 녹슨 철문을 열고 취조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아림을 데리고 나가려고 침상으로부터 끌어내 안았다. 책임자인 듯한 자가 깨어나는 아림에게 말했다. "아림 대신님 고생 많았습니다. 이제 법에 의한 절차로써 매듭지으셔야지요." 아림은 축 쳐진 몸으로 아무 대답도 없이 그들에게 안겼다. 눈을 뜬 아림은 여전히 피곤에 지친 상태여서 자신의 꼴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아림은 철문을 연 사이로 들어오는, 아직은 붉은 빛을 띤 아침 햇살의 눈부심에 다시 눈을 감았다. 호송원들은 그녀에게 일단 옷을 덮어놓은 상태로 고관대작 전용의 無輪低床車에 태웠다. 잠시 후 그들은 미끄러지듯 떠나갔다. 군영은 여전히 평상시의 軍務를 보는 평온한 분위기로 아침을 맞았다. (3) 女皇 貴順摩耶姬姑 저 산 너머 님의 모습이 다가온다. 摩耶는 기다림의 한을 푸는 벅찬 마음에 그를 향해 달려나와 般若의 넓은 가슴에 안긴다. 그의 굳센 팔의 압박감이 그녀를 숨결을 불규칙하게 한다. 그녀의 체온은 상승한다. 그녀의 몸의 긴장은 계속 高潮되다가 어느 순간 일시에 풀어지며 그녀는 깊은 사랑의 아득한 深淵에 내맡기어져 하염없이 빠져든다. 貴順摩耶姬姑는 사랑의 꿈에 때로는 숨이 가빠지며, 때로는 안타까움에 긴 한숨을 내쉬며, 때로는 새근한 평화로움으로, 완만한 뒤척임을 보이며 늦가을의 긴 밤을 보냈다. 女皇國의 아침은 뽀얀 안개 속에서 女皇의 거처 모란성(牡丹城)의 망루와 첨탑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면서, 皇宮의 高臺廣室의 雄姿와 함께 시작되고 있다. 그 누가 이 광경을 보고 있다면 그의 귀에는 이미 꿈속에나 들었음직한 音律의 가락이 幻聽으로 들리고 있을 것이다. 전생인류시대의 자금성과 같은 높고 굳건한 성벽과 모슬렘사원과 같은 壯麗한 建物들로써 이루어진 이 神秘로운 別世界. 女人의 香氣 자욱한 中央 太花閣 寢殿은 女皇 貴順摩耶姬姑의 애달픈 사랑의 꿈이 밤마다 孕胎되는 곳이다. 黎明이 틀 무렵부터 貴順摩耶姬姑의 寢床 周圍에는 二十餘名의 起床式 執典官 一行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女皇의 起床時刻에 맞추어 그녀를 깨워, 女皇國의 새 하루를 여는 儀式을 擧行하는 이들이다. 이윽고 女皇의 起床 時間이 되었다. 모두가 한결같이 敬虔한 祭禮儀式을 위한 짙은 黃色바탕에 褐色 줄무늬의 繡가 놓여진 衣冠을 갖춘 이들 執典官 一行은 다시 整列을 가다듬었다. 곧 이어 이들에 의한 起床式의 執典이 始作되었다. 女皇의 머리맡의 大執典官은 서서 呪文을 외우고 있고 左右에 꿇어앉은 副執典官들은 연거푸 머리를 조아리며 呪文을 復唱했다. "始女皇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 地基金枝願爲大降" "시녀황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지기금지원위대강" "... ..." "貴順摩耶姬姑 盛德治下到來 吸理合理 娑婆亞" "貴順摩耶姬姑 성덕치하도래 훔리함리 사바아" "... ..." 약 십분 간을 반복해 계속되는 주문 끝에 貴順摩耶姬姑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잠을 깬 그녀의 모습은 이 날도 例나 다름없이 커다란 실망감과 아쉬움에 잔뜩 찌푸린 애처로운 표정이었다. 깨어나자마자 그녀는 헐떡이며 깊은숨을 거푸 내쉬었다. "폐하 진정하소서. 폐하의 성체의 冷淨을 위해 聖水를 드시옵소서." 그녀의 머리 옆에 자리한 부집전관이 꿇어앉은 자세에서 두손을 높이 쳐들어 성수잔을 바쳤다. 성수를 받기 위해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한쪽 손을 짚고 힘겹게 고개를 들고 상체를 틀다 곧 다른 한쪽 손으로도 바닥을 짚어 무거운 가슴을 들어올려, 아직 졸린 눈을 껌뻑거리면서 그녀는 부시시 일어났다. 엷은 불투명의 부드러운 흰 천이 그녀의 어깨 이하를 덮고 있었다. 온몸의 完璧曲面化를 이루는 도타운 피하지방층에 싸인, 항시 熱氣에 충만한 몸을 가진 그녀는 잠자리에 들을 때에도 얇은 잠옷 하나로 충분하다. 그녀는 凡人族 일사람이나 숫사람의 가슴팍 만한 성수잔을 한 손으로 받아 마시고 다시 그것을 돌려주었다. 먼저 성수잔을 권했던 부집전관은 여전히 머리를 조아린 채로 두 손을 높이 들어 잔을 받았다. 기상식 집전관 일행은 곧 퇴장했다. 이어서 대기하고 있던 化粧式 집전관 일행이 들어섰다. 貴順摩耶姬姑는 여느 날에도 있는 나날의 일에 불과한 것인데도 그들이 들어서자 금새 얼굴이 빨개지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들은 일제히 꿇어 엎드려 절하며 그녀에게 아뢰기를 "폐하, 성체를 일으키시옵소서." 하고는, 다시 연거푸 절을 되풀이했다. 貴順摩耶姬姑는 형언할 수 없는 부끄러움에 어찌할 바 모르듯이 안절부절 하다가, 정해진 법도에 의한 절차는 어찌할 수 없는지라 곧이어 몸을 뒤집어 엎드린 자세를 취했다. 곧 화장식 집전관들이 다가와서 그녀의 잠옷의 어깨끈을 풀었다. 그리고 그들은 길게 늘어진 어깨끈을 그녀의 몸의 後方向으로부터 잡아당겼다. 범인족의 네 배의 키인 육 미터 오십 센티의 그녀의 몸으로부터 얇으나 불투명한 잠옷이 스르르 뒤로 밀려나갔다. 매끈한 굴곡의 어깨 아래, 皇世女를 기르기 위한 풍부한 皇乳(Royal Milk)의 산실이기도 하면서 또한 그녀의 아름다움을 더욱 조화롭게 하기 위해 탕실탕실하니 잘 발달된, 커다란 젖가슴이 드러나 보였다. 선홍색의 젖꼭지는 자고 일어난 지금에도 촉촉한 물광택을 내며 양쪽 가슴의 중앙에 솟아 있다. 끈을 당김에 따라 그녀의 몸의 뒤쪽으로 당겨지던 잠옷은 허리에 이르러 더 당겨지지를 않았다. 그냥 뒤로 잡아당기면 그녀의 잘록한 허리에 비해 너무도 탐스러이 퍼져있는 그녀의 엉치에 걸려 더 당겨지지를 않는 것이다. 그래서 양옆으로 다시 담당관들이 와서 잠옷을 옆으로 잡아당겨 벌리고 나서야 그녀의 허연 잠옷은, 사르르 兩半球의 곡면을 굽이쳐 미끄러져 훌러덩 내려앉았다. 시리도록 눈부신 그녀의 육체가 이제 女皇國의 오늘, 처음으로 범인족들 앞에 내 보여지는 것이다. 아아 그 모습 어찌 언어로써 표현할 수 있으랴! 전생인류의 남자 중에는 간혹 여성의 육체를 말초 쾌락적 탐닉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냉소로써 일관하면서 그 가치를 절하하는 냉혈한의 부류가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자를 이 자리에 있게 하여 그녀를 보게 한다면, 곧바로 이 超美體의 충격감동의 숨막힘에 사로잡혀 한 동안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이내 목놓아 참회의 울음을 울고 마는 수밖에는 없으리라. 그녀는 침상에서 내려왔다. 일어나지는 않고 그대로 기어서 나왔다. 그리고는 살금살금 몸을 움직거려 오십 미터 정도 떨어져있는 化粧室로 향했다. 가는 통로에는 온통 새빨간 융단이 두텁게 깔려 있어서 그녀의 보드라운 피부의 무릎 부위가 그녀의 무거운 체중을 감당하다가 상하는 일이 없도록 했다. 전생인류시대 馬毛라는 여배우가 빨간 융단 위에 엎드려 몸을 뻗치고 있는 사진을 참조하면 그 대강의 분위기는 짐작될 수 있겠으나, 곧이을 아침일과의 벅찬 감당을 예비해 수줍디수줍은 그녀의 모습을 견주어 나타낼 수 있는 것은 어느 시대 어느 문헌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오직 그녀에 대해서 보다 알고 그녀를 깊이 이해하는 것만이 그녀의 일상사의 모든 모습을 그릴 수 있는 길이다. 좌우가 온통 거울로 치장된 女皇전용의 화장실에 도착해 그녀는 그녀를 수행해 같이 온 화장식 집전관들과 미리 대기하고 있는 화장실 당당관들에게 둘러싸여 그녀에게 역시 필수적인 아침 의식을 받는다. 그녀는 엎드린 자세로 중앙의 化粧器에 몸을 걸쳤다. 완만한 둔덕이룬 고운 모래사막의 한쪽, 오목하니 아담하게 관목수풀 우거져 자리잡은 오아시스에서 間歇泉이 흘러나오듯 하니, 담당관들은 서둘러 溫水를 받아내고 噴水池를 닦는다. 이어서 雪山 골짜기의 검붉은 百合花로부터 줄줄이 터져나오는 황갈색의 꽃망울에 대해서도, 담당관들은 더욱 성심을 다해 수거하며 백합화부위의 재 청결에 만전을 기했다. 이 의식에 대해서는 본래 보다 구체적이고 명확한 寫實描寫의 기록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신성한 신체의 물질대사의 의미를 여타의 한낱 저급하고 추악한 기피대상의 잡것들과 구분할 수 있는 심미안을 갖지 못한, 반문화주의자들의 야만적 파괴행위(Vandalism)에 의해서 대부분 遺失되고 말았다. 그들 모두 맡은 소임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는 있지만 그들의 어려움은 결코 이 일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其實 至純至潔한 女皇의 성체로부터의 그 무엇하나 존귀하지 않은 것이 있으랴. 단지 그녀의 極端女ㅅ性에 말미암아, 나날의 의식임에도 불구하고 극도의 부끄러움에 온몸을 파르르 떠는 그녀를 어떻게 慰撫하냐는 것이 그들의 지상과제이다. 화장식 과정에서의 그녀의 얼굴 표정은 먼저 화장실로 오기 전까지의 수줍음에서 훨씬 강도를 더해, 비록 소리는 내지 않고 눈물을 흘리지도 않지만 깊이 흐느껴 울고 있는 모습 그대로였다. 전생인류 중 일부 加虐性淫亂性慾者들이 보았다면 그들에게는 원하는 바 최고의 쾌감을 줄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녀의 어려운 일도 이윽고 마쳐지고 그녀는 비로소 조금 건너의 위치에, 그녀의 몸의 모습을 본떠 파여 있는 하트모양의 거대한 욕조에 몸을 담글 수 있었다. 물 속이야말로 그녀를 범인족과 다름없이 자유로이 노닐게 하는 곳이 아닌가. 바로 전의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나 그녀는 담당관들을 멀리 물리치고 잠시 가볍고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 텀벙 텀벙 그녀는 어린아이 마냥 물장난을 한다. 그녀는 물 속의 요정으로 한 동안을 지낸다. 욕조의 옆에 위치한 거울이 熱水로부터 김이 서려 뿌예지자, 그녀는 손으로 거울에 물을 끼얹어 맑게 해 다시 자신의 모습이 잘 비쳐지게 한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그녀 자신에게도 삶의 의미를 부여해 주는 귀중한 것이었다. 그녀의 금년 나이 삼백이십 세. 이십 세에 이미 풍만한 成女의 모습을 갖춘 이후로 어언 삼백 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녀의 아름다움은 쇠잔의 기미는 없이 나날이 더해가고만 있다. 다만 이것도 결코 영원한 것은 아니라는 것에, 때때로 느끼는 두려움과 안타까움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사랑의 단꿈이 번번이 깨어지고 자신의 어여쁜 몸을 진정 사랑하는 이에게는 바치지 못하는 그녀. 현세에서의 사랑의 불가능이라는 벗어날 수 없는 이 숙명에 그녀는 이따금 삶의 의욕을 잃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육체에 대해서는 생명과 아름다움을 至上으로 삼는 그녀 자신의 여린 마음으로서는, 마음써 소중히 여김 이외의 다른 생각은 가질 수 없었기에, 그녀는 恨서린 생을 自己憐憫의 마음으로 지속하고 있다. 그녀가 욕조에서 나오니 갑자기 느끼는 寒氣에 소름이 돋으며 그녀는 몸을 와르르 떤다. 송이송이 물방울들이 소낙비 마냥 사방으로 튄다. 대기하던 담당관들은 약간의 물세례를 받는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그녀의 몸을 여덟 명의 담당관들이 흡사 대형 플래카드 마냥의 긴 타월을 같이 들고 덮어 감싼다. 담당관들의 도움으로 몸을 닦은 그녀는 보료가 깔린 바닥에 한쪽 팔을 짚고 다소곳이 앉았다. 물기 젖어 축축한 광택 번뜩이는 다갈색의 머리카락이 휘 늘어졌다. 빗질 담당관이 두 손으로 자기의 가슴폭만치 길게 만들어진 참빗을 들고 그녀의 머리끝에서 엉덩이까지 수직으로 빗질하는 동안에 다른 담당관들은 그녀의 얼굴과 몸 여기저기 피부보호를 위한 化粧液을 바른다. 모든 화장액은 透明材製로서 그녀의 피부빛의 보다 건강한 보전을 위함일 뿐이다. 번거로운 화장식이 다 마쳐졌다. 그녀는 着衣臺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두 팔을 양쪽으로 내민다. 착의담당관들 중의 하나가 그녀 자신이 나날이 길쌈하며 짠 그녀의 皇服을 가져와 한 쪽 팔을 끼우고 건너편의 담당관이 곧이어 다른 한 쪽 팔을 끼운다. 앞에서 옷고름을 여미어주니 그녀의 착의는 마쳐진다. 황복은 망사와 같이 성기게 짜여있고 군데군데 금은보석으로 치장되어 있다. 그녀가 옷을 입어도 틈 사이로 희끗희끗 보이는 그녀의 상아색의 탐스러운 피부는 금은보석 장식보다 더 아름답게 빛난다. 그녀는 이제 수라실로 들어간다. 수라실에서는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 수라담당관들이 그녀에게 예를 취하고 그녀의 앉을 자리를 수석담당관이 옆으로 손 내밀어 가리켜 권한다. 그녀는 비스듬히 기대게 되어 있는 食臺에 자리했다. 그녀는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식탁에서 약간의 아침을 들었다. 잔 손 움직임이 거북한 그녀를 위해 여러 가지 찬그릇을 그녀 옆에 바꾸어 내놓는 등의 담당관들의 노고가 필요하다. 아침식사는 그녀의 소화기관을 깨우기 위한 정도에 불과하고 그녀의 식사는 사실상 온종일 간식형태의 식사를 계속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생명의 활화산과 같은 육체를 가진 그녀는 당연히 많은 기초 대사량을 필요로 하나, 아름다움을 위해 너무나도 잘록해진 허리에서는 그에 걸맞은 만큼의 많은 양의 음식물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정해진 식사시간 이외에 항상 자신의 곁에 음식물을 두어 거의 늘상 섭취하는 방식을 취한다. 수라담당관들은 그녀가 아침식사를 모두 마치자 점심 식사 때까지 그녀가 간식마냥 늘상 먹을 과자 같은 음식을 그녀의 몸 모양을 닮은 보라색의 단지에 담는다. 저희들이 들어다 주겠다고 하는 수라담당 일사람들을 한사코 물리치고 내가 직접 가지고 가겠다며 과자단지를 한쪽 팔로 끌어안고 수라실을 나서는 그녀의 모습은 차라리 귀엽기까지 하다. 이제 그녀는 아침의 모든 차비를 마치고 자신의 龍床에 자리잡아 오늘 하루의 일과를 보게 된다. 짙은 붉은 색의 커튼이 드리운 그녀의 거처에서 貴順摩耶姬姑는 오늘의 일정을 헤아려 보았다. 이제 비로소 잠이 완전히 깨어 막 반짝거리기 시작하는 그녀의 적황색 눈을 깜빡이며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위아래의 긴 속눈썹이 서로 부딪쳐 바삭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그녀는 오늘이 매우 중요한 날이란 것을 깨달았다. 바로 그녀의 맏딸 화자 마야희고2세에게 동방 바다 개척의 敎示를 내려주기로 한 날이 아니던가. 자신의 품을 떠나게 될 그녀에게 어떻게 달래는 말을 해 주어야 할 지 걱정도 앞섰다. 그녀는 궁인을 시켜 딸 화자를 불렀다. 정해진 授乳의 시간 보다 조금 이른 시각이었다. 곧 화자 마야희고2세가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어머니 小女 부름 받고 왔사옵니다." "어서 가까이 오너라. 내 오늘 네게 아주 중요한 교시를 전해 줄 것이 있단다." "말씀해 주시옵소서. 소녀 모황마마의 뜻에 어찌 다른 마음 있겠사옵니까." "우리 아사녀황국의 동편에는 맑은 물로 가득 찬 깊고 푸른 바다가 있음을 너는 익히 알 것이다. 그 바다의 건너에는 화산과 온천이 도처에 散在해 있는 아름다운 큰 섬들이 있다. 너는 이제부터 그 곳에서의 새로운 女皇國 건설을 위한 준비를 할지어다. 이제 너도 조금 더 자라면 활동을 하기 어렵게 된다. 그 전에 국가건설을 완료해야 한다. 지금부터 준비해 내년 이맘때에는 출발을 하도록 하여라." 貴順摩耶姬姑가 말을 할 때에는 그녀의 감정상태에 따라 안실의 벽면이 떨리는 정도의 超低音의 발생이 있고 그녀의 목소리는 이 초저음 위에 실려 나타난다. 즉 그녀의 第一帶域周波數(first formant)의 음은 그녀의 감정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전생인간들의 可聽周波數의 범위를 벗어난다. 그리고 언어의미를 가진 고전 여성적 목소리는 그 다음의 第二帶域周波數(second formant)에 의해 실려 나온다. 전생인간이 만약 그 자리에 있는다면 귀를 멍멍하게 하는 둔중한 초저음의 떨림과, 이에 어우러져 흘러나오는 맑고 우아한 중년여성의 목소리를 느낄 것이다. 貴順摩耶姬姑는 자신의 용상이 있는 자리 뒤켠에서 붉은 바탕에 금실로 수놓은 책자 세 권을 꺼내어 앞에 놓으며 딸에게 말했다. "나는 이백칠십 년 전에 大陸西北端半島의 나의 모황 헤다 발키리아 13세 폐하로부터 동방개척의 교시를 받고 이를 실행해 지금에 이르렀단다. 너의 마야희고2세의 칭호는 곧 이어 태어날 너의 아우에게로 승계될 것이니라. 너는 이제부터 화자이자나미(花子伊耶那美)의 이름을 가진다." 화자이자나미는 현재 나이 오십 세로서 머리칼, 눈빛, 살결 등은 어머니 貴順摩耶姬姑와 비슷했지만 턱이 조금 갸름하고 살짝 덧니가 나 있는 것이 조금 달랐다. 키는 이 미터 이십 센티쯤 되었으며 하늘색의 바탕에 약간의 금색장식이 수놓아진 원피스의 의상을 입고 있는데 얼굴은 전생인류의 풋풋한 열일곱 살 少女의 인상을 주었다. 인간으로서의 성년의 나이는 물론 넘은지 오래지만 女皇族 나름의 또다른 성숙나이인 일백 세 가량에는 한참 못 미친다. "어머니 어인 말씀이옵니까? 소녀는 언제까지나 어머니 곁에서 같이하고 싶사옵니다." 화자이자나미는 그 전부터 약간의 낌새를 느껴 내심 우려했던 것이 현실로 나타나자 모황의 품으로 다가가 안기면서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너의 심정을 낸들 모를 바 있겠느냐. 나도 너와 비슷한 나이 때에 모황폐하의 곁을 떠나 점차 불편해지는 몸으로 백성들과 함께 높은 산맥을 넘고 호수를 건너고 사막을 가로질러, 근 사십 년이 흐른 뒤에야 이곳 동쪽 끝의 살기 좋은 땅을 발견하고 여기에 자리잡은 거란다. 나는 단지 동방개척의 교시만을 받고 춥고 거친 대륙을 오랫동안 헤매었지만 너의 경우에는 바다 건너 살기 좋은 목적지가 있으니 심한 고생은 하지 않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어머니 어릴 적 희미한 기억으로는 제게도 언니가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지금 어디에 살고 있습니까?" 이 말에 貴順摩耶姬姑는 약간 마음이 아픈 듯한 표정만 짓고 대답을 얼버무렸다. 한동안 두 모녀는 서로의 손을 잡고 눈물로써의 의사표현만 할 뿐이었다. 조금 있다 딸은 다시 그녀의 어머니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모황의 앞가슴 위에 걸쳐있는 황복을 아래로 젖혀 촉촉한 훈기 어린 쌍 솟을가슴을 드러나게 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앞으로 받을 때가 얼마 남지 않은 모황으로부터의 皇乳의 수유를 받았다. 이것이 그녀로 하여금 女皇族으로 자라나게 하는 근원이다. 황세녀를 기르기 위한 수유가 마쳐진 뒤 貴順摩耶姬姑는 꺼내놓았던 세 권의 책자를 딸에게 건네주었다. "네가 여지껏 말로만 들었던 우리 女皇國의 창건역사와 발전역사 그리고 우리 女皇族의 생리가 적혀 있는 세 권의 책을 읽어 내년 동방 출발 이전까지 모든 내력을 알 수 있도록 하여라." 이 때 궁인으로부터 보고가 들어왔다. 측근 대신중의 하나가 반역 모의죄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지만 이렇다 할 단서는 잡지 못하여, 이 곳에서 女皇의 마지막 심판을 받게 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오늘 같은 중요한 날에 하필 무슨 상서롭지 못한 일이람." 貴順摩耶姬姑는 이마를 약간 찌푸리며 다시 말했다. "얘야, 지금 떠나는 것은 아니잖느냐? 그리고 가더라도 언제라도 너와 나는 서로를 볼 수 있도록 서로의 방에 千里鏡을 마련해 놓고, 수시로 오갈 수 있도록 專用船도 구비해 놓을 것이니, 그리 알고 너의 거처로 가거라. 곧 중요한 일을 주재해야만 할 것 같다." "예, 어머니 평안히 계시옵소서. 소녀 이만 물러가겠나이다." 화자이자나미는 모황이 건네주는 것들을 받고는, 방에 드리워진 짙붉은 윤기 나는 커튼을 걷고 나왔다. 그리고는 태화각을 나와 자신의 거처인 少花閣으로 향했다. 소화각의 내부는 하나의 정갈한 살림집 마냥 되어 있었다. 화자이자나미는 안실로 들어가 세 권의 책을 살폈다. 책의 표제는 다음과 같았다. '熙永大始女皇後天開闢史' '列女皇記' '女皇族生理錄' 화자이자나미는 창가의 낮은 책상에 앉아 희영대시녀황후천개벽사부터 차근차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미 날이 밝은 지는 오래였지만 밖에는 해는 나지 않고 가랑비가 내렸다. 가끔씩 후둑후둑 약간은 굵은 빗방울이 그녀의 거처의 창문에 뿌려졌다. (4) 熙永 大始女皇 책은 비록 보관은 잘 되어 있었지만 오랫동안 펴 보지 않아서인지, 겉표지는 조금 버겁게 열리면서 약간의 먼지를 뿜어냈다. 화자이자나미는 손을 입가에 대고 손수건으로 세심하게 먼지를 닦으면서, 뻣뻣이 굳은 듯하면서 서로 붙어있는 속종이를 조심스러이 떼어 펼쳐가며 읽어갔다. 어머니 귀순마야희고가 이 책을 보고 나서 서가에 보관해 둔 지도 이미 이백여 성상이 흘렀으니 세월의 무게는 책장 하나하나에 고스란히 얹혀 있었다. 희영대시녀황후천개벽사의 첫머리에는 후천개벽 이전의 인간사에 대한 서사가 있었다. 그리고는 선천시대를 지배했던 남자들의 죄업의 시대를 딛고 일어서 새로운 시대를 연, 모든 여황국의 시조 희영대시녀황의 등장이 이어졌다. 태초에 생명이 태어날 적에 생명의 근본은 여성이었다. 지순한 생명의 그 가치만을 추구하며 평화로운 낙원에서 그들의 바램에 부족없이 살던 태초의 인간들. 어느 시절 어느 이유인지 인간이 그들의 낙원을 잃은 뒤로 인간은 그 살아감을 위해 그들의 피와 땀을 요구하는 노고를 해야 했다. 삶을 위한 노동이 필요해지자 그것은 생명의 짐을 덜 진 남자들이 맡아야했다. 남자들은 노동으로 여자를 받들기로 맹세했다. 그 옛날 처음 낙원에서 내려와 살 때는 남자들은 여자들을 귀히 여겨 마다하지 않았다. 굳은 그 맹세들은 다 어디 갔는가 인간의 삶이 태초의 숭고함을 잃어가면서 사람들 사이에는 생명 그 자체보다 그를 위한 노고를 중히 여김이 일어났다. 목적과 수단 선후관계의 뒤바뀜이 일어나 남자는 생명부양을 볼모로 삼아 여자를 그의 발아래 매어두게 되었다. 그들은 인간의 낙원상실 이전의 사실도 꾸며냈다. 남성에서 여성이 나온 양 하여 생명탄생의 선후본말 마저 뒤집었다. 그리고는 失樂園의 책임도 여자에 엎어 씌웠다. 개체발생이 종족발생을 되풀이하듯 개개인의 내력도 원죄를 재반영하는가. 한 남자는 한 여자에게 사랑의 굳은 맹세하여 자신의 올가미에 걸어 놓고는 역시 부양의 칼자루로써 굴종을 강요하도다. 人間史와 人間事 모든 것이 남자의 손에 넘어간 그로부터 인간의 피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好戰性은 갈수록 더해만 가는 대량살육의 兵器로 나타났다. 어찌하면 남을 누르고 자신이 사느냐가 모든 남자들의 한결같은 지향이었다. 모두는 상대방을 이길 방도를 짜내기에 골몰했다. 병기에는 갈수록 더 많은 역할이 주어졌다. 결국 병기는 그들의 맡은 바 모든 일을 대신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스스로 몰락의 길을 열어 놓고 말았다. 남자의 완력도 이제 기계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었다. 남자의 본래 가진 것은 여자를 위하여 아무런 보탬이 될 수 없었다. 남자의 힘은 한낱 소유하는 여자를 억압하기 위해서만 쓰일 뿐이다. 이로부터 여자들은 남자를 볼 때 그의 면면 자체보다는 얼마나 자기를 아껴줄 수 있는가를 시험하는 것에 비중 두게 되었다. 남자들은 본디의 미덕도 잃어 갔다. 더이상 미인을 얻기 위해 용자(勇者)는 필요하지 않다. 여자를 위하여 남자가 갖추어야 할 것이란 그저 강한 탐녀성(貪女ㅅ性)과 집단 내에서의 생존을 위한 술수력 속응력(速應力)일 뿐이다. 남자의 면면은 갈수록 경박해지고 왜소해져 갔다. 그러나 여전히 여자로 하여금 남자의 위치를 맞걸고 일어서기에 발목 잡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여성에게 주어졌고 또 주어졌기에 여성인 자식출산의 버거운 짐이었다. 뭇여성의 자아고양의 꿈은 한결같이 이에 의해 벽에 부딪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사회의 편리화는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인간의 모든 일의 편리화와 자동화에 자손의 생산과 양육은 예외가 되지 않았다. 여자들은 자식생산에 귀중한 시간을 앗기지 않기 위해 하나 둘 대리임신과 대리출산을 택함으로써 사회참여에서의 불리함을 떨쳐내었다. 마침내 서기 2700년, 지구상 모든 여성의 출산은 완전자동화 되기에 이르렀다. 차세대 출산 위한 모든 것을 위하여 지구연방은 공익법인(公益法人) 국립생산원(國立生産院)을 설립해 전 여성의 자궁을 위탁관리 했다. 모든 인간 출산의 자동화는 인류사회에 커다란 혁명이었다. 여성들이여 그대들은 임신과 출산의 굴레에서 완전해방 되었노라. 또한 양육의 번거로운 속박도 그대들에게서 풀려졌도다. 그대들은 이제 가뿐한 몸으로 그대들의 자아실현에만 힘쓰라. 그 누가 원시적 생식행위를 직접 하려 한다는가 저마다 삶의 질의 향상과 자아실현을 위한 치열한 다툼에 여념 없을진대 혹 누가 그런 시대착오의 망상을 갖는다면 그자는 곧바로 이 超 자동화 경쟁사회의 영원한 낙오자밖엔 될 수가 없으리라. 그 누가 쾌락을 위해 육체교접을 하려는가 무한한 즐거움의 가상연애야 말로 무한정 인간욕구의 현실한계 극복일진대. 저급하도다 육체적 성관계여. 인간 性생활의 혁명이 도래했으니 그것은 불의 발견에 견줄 대전환의 의미라. 이렇듯 성생활의 혁명에 의해 세상사 모든 일의 남녀간 불균형은 바로 잡혔다. 그러나 아직도 남자들은 그네들 기득권의 바탕 위에서 세상을 이어가려 하고만 있었다. 기약 없는 세월의 흐름이 계속되었으나 그런 중에도 머지않아 여성의 천하가 오고 말 것이라는 기대는 갈수록 더해 가고 있었다. 지구상 모든 여성들이 희망과 초조함을 더불어 갖던 시대에, 마침내 인류역사에 대 전환을 이끌어 낼 절세의 초녀(超女)가 나타났다. 바로 후천의 대개벽을 연 대시조 희영이었다. 後天開闢 大始祖 全 女皇國 共同太祖 熙永 大始女皇. 그 이름 萬古에 빛나는도다. 그녀는 서기 3190년 지구연방공화국의 수도 동북경의 교외에서 당시 국립동북경대학 물리학과 주임교수이며 전년도 노벨상 수상자인 신정욱 교수와 당시 국립예술원의 수석 악극단원 이었던 이시호 여사와의 사이에서의 최고의 지성과 최고의 감성이 맞닥뜨려 어우러진 수정란 중에 맏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나서부터 초인적인 총명함을 보여 이미 오 세에 이르러 여섯 지방 방언을 유창히 구사할 수 있었다. 음악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 칠세 때에는 굴지의 교향악단과 바이올린 협연을 했을 정도였다. 구 세 때에는 대학까지의 전 교과과정을 완전히 습득한 바 그녀는 이미 凡人의 교육체계를 초월하고 만 것이다. 그녀는 또한 일찍부터 文才가 두드러졌다. 십일세 때에 쓴 수필집 '少女의 夢想'은 성인의 수준을 넘는 분석력과 소녀의 천진함을 겸비하여 유사이래 드물었던, 인간본연의 심층 정서를 드러낸 글이라 한다. 그러나 어린 희영 대시조는 결코 심각한 문화탐구 일색의 어려운 진지함만의 말 건네기 어려운 조숙한 소녀는 아니었다. 대시조께서는 한편 소녀다운 발랄함과 풍부한 유머를 동반한 활동적 면모도 갖추어 그녀를 대하는 모든 이들을 편안케 하며 그녀 만남의 기쁨에 취하게끔 했다. 그녀는 각종 스포츠에도 취미를 가졌는데 이내 직업선수의 수준을 넘어섰다. 십삼 세에는 전 지구 테니스 대회에서 우승했고 올림픽의 피겨스케이팅과 체조 수영 각 종목에서도 그녀는 참가 여부만이 문제가 될 뿐이었다. 대시조의 예술감각은 연기예술에도 미치었다. 십오 세 때는 그녀를 보고자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영상기 방송과 영화에 출연해 면모를 공개하니 만인의 마음은 그녀의 幻影으로 메워지고 말았다. 십칠 세 때에 세계미인대회에 참가신청을 하니 당해년도 참가 예정자들 모두가 출전을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것은 그녀와 미를 견준다는 것은 그네들 스스로 초라해짐을 결과할 밖에 안되는 때문이더라. 그녀는 그리스 조각 같은 늘씬하고 기품 있는 몸매 정갈한 보석과 대리석을 골라 깎아만든 이목구비에 솜사탕의 달콤한 목소리로 애초부터 다른 여자와의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녀의 美의 面面 그 무엇보다도, 맑고 초롱한 눈매에서 뿜어 나오는 理智的 아름다움은 美人大會 史上 전례가 없는 것이라고들 했다. 모든 藝技와 모든 美德의 萬人之上 超越女 熙永, 그녀가 성장하면서 모든 면에서 여성 남성을 통틀어 최고의 위치를 차지해 가자 이제 성인이 되는 그녀가 과연 어느 방면에 진출하냐는 전 지구연방 모든 국민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녀의 나이 십구 세에 드디어 그녀는 자신의 진로를 밝히게 되었다. 사람들은 아마도 예술계나 연예계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이미 예약해 놓은 頂星의 자리를 향유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녀가 학문습득에 열중하는 가운데에도 틈틈이 그린 그녀 자신의 모습을 포함한 각종 소재의 구상 비구상 습작품만 하더라도 이미 여느 기성 대가의 작품이상으로 호가하는 것이 되었으니 화가로서도 최고의 자리는 마련되어 있었으며, 또한 그녀의 모습이 나온다는 그것 하나만으로 곧 영화 연극 방송극 모든 영상매체의 흥행은 보장되어 진작부터 당대 최고 인기배우의 순위를 교란하고 있었으니 이는 그녀의 일상사만을 추적촬영해도 여타의 꾸며낸 영상매체보다도 더 진솔한 감동을 그녀 보는 이에게 줄 수밖에 없는 터 였더라. 그녀가 저자신의 여흥을 위해 즉흥으로 불렀던 노래의 녹음들은 이미 당대의 기존 톱 가수 이상의 가창 능력에 의한 것이었고 당대의 여느 최고 작곡가의 선율을 능가하는 것들이었으니 자작곡 가수로서의 最高位에의 도달 또한 그녀에게는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그녀의 일기장만 활자화하여 내놓아도 이미 第一賣書의 위치는 따 놓은 당상이었으니 문예작가의 마당에도 이미 頂上에는 그녀를 위한 빈 의자가 얹혀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이들 분야에서의 최고위를 그녀가 가진다 하더라도 그 향유하는 지위는 그녀가 가진 모든 것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단 말인가. 그렇다면 이미 너무나도 충천해있는 그녀의 지명도와 인기로 볼 때 두 뺨에 솜털 남은 年少한 처녀일지라도 화려히 터지는 폭죽아래 남녀노소 집권당원들의 열렬한 반김을 받으며 정계에서 바라던 바 마음껏 원대한 뜻을 펼칠 수도 있었으니 이는 그녀의 평소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모두가 듣는 이로 하여금 당면한 현실의 정곡을 찌른 지적으로 받아들여져 그녀의 말에 진심으로 감복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던 연유라. 그러나 그녀의 발표는 전혀 뜻밖이었다. 차일피일 발표를 미루어 전 국민의 애간장을 태우게 하던 그녀 어느 날 자청한 기자회견서 하는 말 "나의 능력을 인류의 참 번영 위해 쓰고 싶어요 그 일에 대한 자신에의 대가가 어떠한가는 내게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그녀는 평범한 과학기술자의 길을 택해 국립생산원의 말단 연구원으로 취직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를 흠모해 마지않던 뭇 대중들은 더러는 아쉬움에 크게 실망하기도 하고 더러는 서운함에 못내 애달파 하기도 했으나 그녀의 갸륵한 뜻을 마음에 받아 오히려 흠모의 정을 더하는 국민도 적지 않았다. 어서 인류에 대한 말없는 봉사에 매진하고픈 마음뿐인 그녀는 곧바로 국립생산원의 연구원으로 일했다. 그러나 이미 모든 면에서 달인의 경지에 이르렀던 그녀가 이 정도의 직위에서 그녀의 역량발휘를 할 수는 없었다. 이에 따라 그녀는 전인미답의 초고속의 승진을 거듭했다. 그녀는 이십일 세에 이미 종자개량 유전자분석실의 실장이 되었고 이십사 세에는 종자개량연구개발 전체를 총괄하는 종자개량부의 부장으로 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이십칠 세에 이르러서는 국립생산원의 원장 이상의 실권자라 할 수 있는 종자 수정단의 단장에 올라 차세대 인류생산의 총책을 맡게 된 것이었다. 이제 갓 처녀티 내는 妙齡의 그녀이나 그녀의 미모 만나 숨결을 교류함이 마주한 이에게는 황홀경을 안겨주고 그녀 또한 순수한 동료애에 바탕 두어 그들과의 같이함에 몸 사림을 없이 할새 직원들은 그녀의 나무람도 즐겨 받아 능력 안 능력 밖을 막론하고 열심하니 자연히 연구실적은 일취하고 월장했다. 그녀의 야근에는 부서원은 물론이고 주변의 관계직원이 한결같이 자원하여 그녀 곁의 달콤한 蜜月夜를 보내고자 정성어린 수고를 마지않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지구연방공화국의 국책사업인 차세대 고품격인종개발사업은 희영대시조의 탁월한 지도 아래 순조로이 진행되어 갔다. 그런데 신생아의 집단생산과 양육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과거의 전통은 그대로 이어져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도 결혼이 요구되는 것이었다. 희영 대시조도 그 예외일 수는 없었다. 이미 그녀에게는 이십 세 이후로부터 각지방 각계의 내노라하는 최고의 엘리트 남자들의 구혼신청이 쇄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희영 그녀와 견주어 볼 때에는 보잘 것 없는 필부들에 불과할 뿐이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정중한 거절만을 거듭하던 희영 대시조도 이십칠세가 되던 해 즉 국립생산원 종자수정단장에 오를 때에 이르러 이제는 빈번한 각종 공식행사 때의 의전 격식에 맞추어 처신해야 함을 감안해 결혼 신청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상대는 당시 지구연방 대통령의 조카이며 상원의원이었다고 전해진다. 희영 대시조가 국립생산원에 헌신해 근무한지도 어언 여러 해가 흘렀다. 그녀가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인간사회의 개선을 위해 노력해온 바 많은 진척이 있었음에도 여전히 인간세상의 지나온 관행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때문에 정작 그녀 자신은 불만족과 회의에만 차게 되었다. 그녀의 결혼 이후 이러한 한계성은 더욱 더 확연히 드러나 보일 뿐이었다. 지구상의 뭇 남자 뭇 남편 같이 희영의 남편 또한 숱한 경쟁과 난관을 뚫고 불세출의 초녀 희영을 자신의 아내로 取한 승자의 성취감에만 醉해 있어 이제 그간의 노고의 값을 되돌려 받자는 것이었으니 "非凡의 용기로 목숨을 걸어 트란도트 공주를 취한 칼라프 왕자와 같이 나는 그대의 지아비로다. 그대의 뛰어난 능력은 나를 위해 쓰이기 위함이로다. 그대는 모든 일에서 나의 婦人됨을 염두에 두라.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인류 역사상 불세출의 지도자가 되도록 마음써 힘써 내조하지 않겠느뇨?" 아아 이 무슨 얄궂은 人間事의 논리란 말인가. 이대로 여성은 아니 인류는 앞으로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인가. 그토록 모두들 찬미해 마지않던 출산의 속박으로부터의 여성해방도 결국은 여성노동력을 착취하고자 하는 남자의 이기심을 위함일 뿐이란 말인가. 여전히 옛 관습의 영향을 받아 여성은 남성의 억압을 당하고만 있도다. 이제 어떤 혁명적인 변화를 주지 않는 한 인류의 장래, 특히 생명주체로서의 여성의 장래는 이렇게 앞으로도 여전할 것이지 않은가. 희영 대시조는 크나 큰 시름에 잠기게 되었다. 이상이 희영대시녀황후천개벽사의 제일장에 나오는 전생인류사와 희영대시녀황 성장기에 대한 기록의 내용이다. 그런데 여황국에 떠도는 야사에는 희영대시녀황의 면면에 대한 실상은 정사에서 서사된 바와는 어느 정도 아니 상당히 다르다는 말이 있다. 그녀가 국립생산원의 연구원이며 종자수정분야의 최고책임자였다는 것에는 일치를 보이고 있으나 그녀가 이 직위에 오르기 이전까지의 모든 행적에 관해서는 그저 평범한 집안에서 자라났으며 말이 적고 사교성 없는 여자였다는 사실밖에는 이렇다 할 믿을 만한 기록은 있지 않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녀의 외모는 정사에서 서술된 바와 같은 빼어난 미모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작은 키에 그저 평범하고 통통한 몸매에다 눈은 지독한 근시로 굵은 검은 테의 도수 높은 안경을 쓰고 있었고 얼굴은 둥글넓적하며 이중 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평소에 웃음도 별로 없고 화내는 일도 별로 없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지내곤 했다 한다. 또한 그녀가 종자수정분야 책임자로 있을 당시에 그녀의 나이는 사십 세에 가까웠으며 독신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뚜렷한 근거가 없는 일설에 불과하니 크게 비중을 둘 만한 가치는 없다. 여황국에서 이러한 근거 없는 야사에 관심을 두는 자들은 대개가 일사람으로서의 기능에 무언가 결함이 있는 자들로서, 제대로의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고 어찌해서라도 뒤틀리고 왜곡된 것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이 신성하고 고결한 여황국의 옥의 티라 할 수 있는 자들뿐이었다. 가랑비는 조금씩 그 정도를 더했다. 화자이자나미는 방안에 서늘한 기운이 더하자 모포를 뒤집어쓰고는 자세를 고쳐 앉아 이 성스러운 대역사의 기록을 음미하면서 새삼스러운 감동에 빠져들어 갔다. (5) 正史와 野史 야사란 것이 때로는 정사보다도 그 정확도(精確度)와 치밀함, 사건의 발생과 결말의 논리전개의 완벽성 등에서 앞서는 수가 종종 있다. 정사는 발생당시에 그 사건이 차후에 가지는 중차대(重且大)함을 예기치 못하는 상태에서 기록된 사실(史實)에만 근거해, 귀납적인 전후관계 서술을 한다. 그러므로 혹 중간에 사실이 누락됨으로 인해 전체적인 체계의 허술함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야사는, 좋든 나쁘든 혹은 실리(實利)가 있든 없든 간에, 무언가 목적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미리부터 합리성의 명분을 고려하며 연역적으로 구성되어서 때로는 정사보다도 탄탄한 줄거리를 갖기도 한다. 그리하여 대중의 호기심에 편승해 사실(事實)인 것 마냥 전해지곤 한다. 야사에 의하면 당시의 국립생산원의 연구개발사업도 원활히 잘 추진되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전해진다. 연구원들 사이에는 어떻게 해서라도 집단의 힘을 이용해 자신들의 자리를 유지하여, 계속해서 천락자연급(天落自然給)을 얻어낼까의 궁리만 하는 자들이 목청을 높이며 서로의 동료애와 인화단결만을 외치고 있었고, 국록을 받는 만큼의 국가사회에로의 봉사를 강조하며 무언가 보람있는 일을 추진하려고 하는 일부 뜻 있는 연구원들은 오히려 현상유지만을 원하는 다수 동료들의 질시를 받고 인간관계 등에서 불이익을 받는 게 상례였다고 한다. 각 연구실장 등 관리책임자들도 무사안일한 대다수 연구원들의 눈치보기에만 급급해 이러한 추세에 편승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일 그 자체에 목적을 두고 있는 자들은 이윽고 다른 민간 업체 등으로 떠나가곤 해 생산원에는 점차로 나태 방종하며 하는 일 없이 나랏돈을 타내 가려는 자들로만 채워져 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얘기들은 다분히 어느 뒤틀리고 왜곡된 심성의 불평불만분자 및 조직 부적응자들의 색안경을 통한 자기변명에 불과함을 유심히 따져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비록 그 자체로서의 사료적(史料的) 가치는 매우 떨어지지만, 평화로움과 순결함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여황국의 모든 일들이 반드시 완전 화합만의 분위기로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았다는 것을 밝히기 위한 참고로서, 조금 인용을 덧붙이는 것일 뿐이다. 이어서 제이장에서는 바로 인류의 역사를 뒤바꾼 모든 여황국의 태조 희영대시녀황에 의한 후천개벽의 대사건에 대하여 장엄한 서사시가 펼쳐지는 것이다. 바야흐로 우주는 가을로 접어 들어가 응당 후천의 人尊시대는 다가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도다. 그러나 아직도 地尊시대의 다툼과 혼란은 계속되고 있으니 세계는 아직도 남자의 지배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연유라. 이대로 아무리 인종개발사업을 진행한다 한들 결국 남성은 남성 여성은 여성 그대로이지 않겠는가. 不世出의 超女가 나타났음에도 결국 그녀는 한 시대의 가십거리로만 그치고 마는 것인가. 그녀가 이룩한 초녀의 신화를 다음 또 다음 연달아 超女들이 계속 나와 이어서 진정한 인간존중 생명존중의 여성천하로의 개벽을 이룰 수는 없는 것인가. 전 지구의 뜻 있는 여성들은 모두 모여 깊이 이 문제를 숙고하게 되었나니. 그들은 오래지 않아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비록 당대에 여성들이 자신들의 부담을 덜고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게 모든 자손생산이 기계화되어 있기는 하였지만 그것도 결국은 남자들이 만들어놓은 기계문명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니 보다 근본적인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는 아니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전여성이 단결하여 새 시대를 여는 계책을 내놓았다. "더이상 새 시대를 열 가능성이 없는 凡人의 씨앗은 증식하지 말지니라. 오로지 인간 역사상 初有의 超女 희영 대시조의 자손만으로 늦출 수 없는 後天의 새 시대를 개막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희영 대시조에게 다가가 "우리 전 여성이 일치 단결하면 이루어지지 않을 일이 없소. 인류의 장래를 쥐고 있는 한 우리의 뜻은 관철될 수 있는 것이오. 바라옵건대 우리의 왕이 되어 주시오. 그리고 당신만의 자손으로, 당신의 超女ㅅ性을 닮은 여자들만으로서 앞으로의 세상을 이끌어 나가게 하여 주시오." 하니 이 뜻밖의 제안을 어느 날 국립생산원 인근의 회합소에서 참석인원 일동에게서 들은 희영 대시조께서는 "내 어찌 그러한 자리를 가진단 말인가? 전혀 천부당 만부당한 엉뚱한 일을 꾸미지 말고 어찌하면 진정 이 온 인류 여성들의 행복을 위한 제도를 만들까의 계책이나 내시오." 하고 성을 내고는 곧바로 총총히 자신의 숙소로 돌아가 두문불출 연락을 끊었더라. 그러나 그들의 의지는 단호하였나니 다음 날부터 희영 대시조를 여왕으로 추대하려는 이들은 그녀의 거처 앞에 진을 치고 단식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대표자를 보내 희영 대시조를 설득하였다. 그러나 "나는 도저히 그럴 자격이 없소. 그렇다면 그대들이 서로 돌아가면서 그대들의 뜻대로 새 세상을 이끌어 나가길 바라오." 대시조께서는 단호히 물리치면서 한 편으로 "어서 단식을 푸시오. 그럴 용기로 그대들이 달리 해야 할 일들이 태산 같지 않소이까?" 하며 자애로운 심려로써 그들이 어서 마음을 돌리기를 간촉하시었더라. 그러나 그들은 끝내 의지를 꺾지 않고 농성을 계속하였고 이들과 한뜻가지는 백성들은 구름같이 모여들어 그치 않는 눈물로써 수락을 촉구하니 백성들의 울음은 강을 이루었더라. 하지만 원망스럽게도 대시조께서는 좀체로 뜻을 돌리시지 않고 어서 모두들 진정하여 돌아가라고 거듭 나무라시기만 하도다. 급기야 희영 대시조의 왕위등극을 열망하는 한 무리 꽃다운 젊은 여대생들이 아리따운 나신을 만 대중 앞에 불살라 보이며 죽음으로써 수락을 촉구하는 실로 가슴 저미는 일이 연 사흘을 내리 일어났더라. 이에 희영 대시조께서는 痛恨의 눈물을 비오듯 흘리시고는 "그대들 백성들의 뜻이 정 그리 하다면 내 어찌 이 天命을 피할 수 있으랴." 하고 거두어들이시니 이 소식을 듣고는 전 지구의 모든 여성들이 서로들 부둥켜안고 감격에 겨워 환호했음은 물론이고 그들은 이레 낮 이레 밤을 경축하며 즐기었더라. 마침내 희영 대시조께서는 王位에 오르시니 영광스러운 후천의 대역사는 막이 올랐도다. 희영 대시조에 대한 한량없는 흠모의 정에 넘친 온 지구의 뭇 여성들은 즉위 후에도 희영 대시조를 더욱 높이 받들어 모셔 凡人의 손길이 안 닿는 神格의 女王으로서 天地人 三皇에 이은 女皇으로 추대했더라. 그리하여 萬古에 빛나는 후천개벽의 始祖 熙永 大始女皇은 탄생하였노라. 희영대시녀황의 즉위과정 주변의 제반 사실에 대해서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너무나 많다. 그렇다면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그녀가 왕위에 오를 때까지 당시에까지도 전 지구의 지배권을 쥐고 있었던 지구연방대통령을 비롯한 지구상의 모든 남자들은 그냥 그대로 보고만 있었느냐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그리고 진행과정의 서사도 지극히 단순하여 마치 전생인류 초기시대와 흡사하고 당시의 복잡다양했을 사회구조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 때문에 고증이 결여되지 않았느냐는 의문이 남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아마도 개벽초기에, 필요한 사관(史官)의 절대부족으로 인해 남성집단들의 행적 등 중요자료의 누락이 있었던 것이 원인이었으리라고 여겨진다. 당시에까지도 주요 사관업무 종사자들은 거의가 남자들이었으므로 그들은 희영대시녀황의 즉위 이후에 대부분 불만을 품고 사직했을 것이다. 그들로서는 더이상 남성위주의 역사를 기록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심하게 좌절을 가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에 비해 야사는 오히려 더 전후관계의 논리정연함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를 지어내어 유포한 자의 치밀성이 놀랍기도 하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안 나리라는 因果의 원칙을 들어 생각하면, 혹 누락된 당시의 시대상황을 알 수 있는 약간의 근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세히 그 내부를 파 들어가 보면, 역시 대부분이 의도를 종잡을 수 없는 왜곡된 抑何心情이 다분히 배어 있는 이야기일 뿐인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야사에 의하면 정사의 시대와 역시 비슷한 시점인 서기 3215년, 그 해 연말에 지구연방 전 인간생산의 총본산인 국립생산원의 種子受精室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담당 책임자 희영은 이제 막 저녁 퇴근 시간이 되어 퇴근 준비를 하는 부하직원들에게 이야기한다. "오늘은 좀 야근을 해야 될 것 같은데요. 김정자씨와 양수정씨는 최정수씨와 같이 남아 종자선별 작업을 함께 해야 할 것 같아요." 이 말에 김정자는 말하기를 "실장님, 저 오늘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아 약속이 있거든요. 오늘을 그대로 보내면 앞으로 칠 년 동안을 홀로 보내게 된데요. 호홋." 하며 급히 핸드백 속에 화장도구를 다시 챙겨 넣고 또 무언가 담겨있는 쇼핑백을 들고는 종종걸음으로 나서는 것이었다. 문밖으로 나가는 김정자를 무표정하게 보던 희영은 옆자리의 양수정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양수정씨는 남아있을 수 있지요?" "죄송해요. 저 오늘은 가족과 함께 보내야 하겠는데요. 오늘 낮에 구내매점에서 케이크도 큰 것으로 사다놓았어요. 어머니와 동생들이 오늘은 같이 성탄예배를 드리자고 하거든요. 실장님, 정말 죄송해서 어쩌죠?" 자연히 희영의 눈길은 선임연구원인 최정수에게로 갔다. 그러나 그는 대뜸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이며 이내 하는 말이, "허허. 실장님 오늘 안 들어가면 저 제 마누라하고 완전히 끝장납니다. 벌써 일주일째 망년회다 동창회다 해서 집에 안 들어가서 집의 假像性驗器가 녹슬 정도예요. 제 마누라만큼 그걸 잘 다루는 여자는 찾기 힘들다고 저도 보거든요. 그러니 오늘은 일찍 들어가야죠. 실장님도 애인 없으세요? 어디 시내 좋은 곳에 가셔서 좀... 오늘은 하루라도 쉬셔야죠. 허허." 희영은 이들의 말에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그렇다고 취업규칙에도 없는 강제야근을 시킬 수도 없고, 만약 그녀가 '일은 목전에 와 있는데 그렇게 자기생각만 하고 무책임하냐?'고 화를 낸다면 이내 그들은 슬슬 내빼며 뒷전에서 '쳇, 저러니까 저 나이에 시집도 못 가지...' 하는 소리나 나올 게 뻔했다. 이들이 모두 퇴근하고 나서, 전 직원 중에 몇 명이 안 남아있는 썰렁한 구내식당에서 희영은 혼자 저녁식사를 마쳤다. 그녀는 다시 종자 수정실로 돌아와 자기 자리의 의자에 걸터앉아, 무덤덤한 표정에 늘어진 자세로 담배를 한대 피웠다. 그리고는 옆의 器機調整室로 자리를 옮겨, 혼자서라도 닥친 일을 처리하고자 기계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차세대를 이을 당해년도 지구연방 자손 생산의 책임을 맡고 있는 것이다. 사실 직접 기계를 만지는 일은 이미 책임연구원급에 속하는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막상 기계를 점검할 일선 연구직원들 모두가 퇴근하고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올해년도 생산목표를 채우기 위해서는 별관 자궁실에 비치되어 있는 2억5천만대의 여성국민의 대여자궁 내에다가 수정실의 보관정자 중 우수한 형질의 것을 선택적으로 주입하여, 그 오류 확률을 감안하더라도 적어도 2억2천만의 신생아의 생산준비는 완료해야 한다. 오늘 내로 여기에 수정할 정자들을 선별해 별관자궁실의 注射 장치에 실려보내야만 정해진 일정을 맞출 수가 있다. 그런데 이렇게 급한 때에 그녀의 부하직원들은 모조리 저마다의 개인적인 약속을 구실 삼아 자리를 비우고 만 것이다. 이 날 아침 원장과의 회의시간 때였다. 주례 간부회의는 연말을 맞이해서 어느 때보다도 더욱 긴장되어 있었다. 이 자리에서 원장은 올해 목표를 차질없이 수행해야 됨을 강조하며 모두를 격려했다. "지금 우리는 우리 국립생산원이 차세대 인류창조의 방향을 제시하는 전 지구인민의 지도자적 역할을 하는 일급 기관이 될 것이냐, 아니면 한낱 저급하고 귀찮은 생식행위의 대리자 역할에 불과한 기능적 허드렛일을 하는 하급 기관이 되고 말 것이냐 하는 기로에 서 있소. 각 부서는 올해의 맡은 바 목표를 모두 차질없이 달성해 내년도에는 우리 모두 보다 희망찬 시무식을 거행할 수 있도록 하기 바라오." 원장은 야심이 많은 자였다. 그는 내년에 신설되는 차세대부 장관자리가 자신에게 돌아오기를 꽤나 기대하면서, 실적을 올리기 위해 적잖이 조바심을 내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차세대부 장관자리란 바로 다음 세대의 모범적 인간 육성의 지침을 결정하는 자리이니 그 자리에 앉은 자의 손에 의해 인간사회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이미 십 년을 가까이 국립생산원장직을 지켜왔던 그로서는 이제는 이렇듯 강력한 권한을 가질 것이 틀림없는 새 자리로 옮겨앉고 싶은 것이 당연하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서 또 정사와의 다른 점이 발견된다. 정사에는 국립생산원이 연구실 연구부 연구단의 많은 단계를 거친 방대한 조직으로 나타나 있으나, 여기에는 말단 연구원 위에 실장 그리고 원장으로 되어 있는 그다지 크지 않은 조직인 것 마냥 씌어 있다. 전 지구 인류의 차세대 인간생산을 도맡아하는 국립생산원이 이렇게 작은 조직으로 될 턱이 없다. 야사의 전파자들은 당시에는 이미 거의 모든 생산활동이 자동화되어 있어서 그다지 많은 인력이 필요가 없었다고들 하지만, 그렇더라도 이런 중요한 인간의 생산에 인간의 손길이 없이 되겠는가. 워낙 엄청난 규모의 이 일을 수행하려면 최소한의 기기점검을 위해서라도 다단계 조직의 많은 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전생인류 중기의 한낱 어느 한 작은 나라의 전화선설비 정도나 하는 대단찮은 연구소도 다단계의 비대한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것만을 보아도 희영대시녀황의 행적에 대한 야사는 역사적 사실보다는 이야기 전개의 편의를 위해 조작된 것임이 드러나는 것이다. 원장의 격려는 사실상 이 일의 책임자인 희영에 대한 다그침이었다. 묵묵히 고개를 내리고 원장의 말을 듣고만 있던 희영은 용기를 낸 듯 고개를 쳐들고 원장에게 말했다. "원장님 현 상태로는 목표달성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연말이라 부하직원들도 거의 휴가를 나가고 그나마 남은 직원들도 요즘 기분이 들떠있기만 해서..." 그러나 원장은 희영의 말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듯 말했다. "무슨 소리요? 휴가간 직원들은 다시 불러오도록 해요. 원내 조직의 기강이 해이해 진 것 같소. 연구개발의 일은 예술과는 다르오.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 필요하고 합리적인 체계성이 요구되는 과학에 있어서는 연구개발 조직의 탈없는 운영이 일의 성패를 좌우하오. 우리의 국책사업의 추진을 위해서는 원내 조직에서의 원만한 인화관계의 조성이 절실히 요구되는데 신실장은 조직 적응력에 문제가 있는 것 같소. 윗사람이 솔선해 모범을 보이면 아랫사람들은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소. 원 책임자가 그렇게 통솔력이 없어서야..." 배석했던 다른 동료실장들도 슬슬 이 문제에는 발을 빼면서 모든 책임을 희영의 담당 부서로만 돌렸다. 가정이 있는 그들로서는 연말의 연휴를 결코 빼앗기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신실장은 집에 가야 기다릴 사람도 없는데 좀 남아서 수고해줘요." 바로 옆에 앉아 있던 특별인간육성 분유개발실의 최준혁 실장이 희영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며 말했다. 다른 실장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원장도 그것 보라는 듯이 고개를 들어 희영을 빤히 쳐다보았다. 한 순간의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희영은 힘없이 말을 흘렸다. "한번 최선을 다해보지요. 그렇지만 장담은 못하겠는데요..." 원장은 다시 고개를 들어 희영을 쳐다보면서 "뭘 그리 생각을 해요? 이 일은 꼭 되어야만 하는 것이란 말이오." 하고 격려인지 위협인지 모르는 말투로 그녀에게 말했다. 옆의 최준혁 실장은 다시 희영을 보고 "신실장 힘내요!" 했다. 곧 따라서 다른 실장들도 "신실장의 어깨가 무겁소. 일이 잘 돼야 하는데..." 라고들 하고는 말꼬리를 흐렸다. 다시 한 동안의 정적이 흐른 다음 원장은 목소리를 가다듬어 "신실장을 믿겠소. 그럼 수고하시오!" 하고 벌떡 일어났다. 다른 실장들도 금방 기립박수라도 칠 듯이 하면서 일어났다. 개중에는 장난 삼아 손을 털듯이 부벼대는 이도 있었다. 회의가 끝난 뒤 모두들 바쁜 걸음으로 자기의 연구실로 걸음을 옮겼다. 어서 남은 일과를 정리하고 오전 중에라도 빨리 퇴근하자는 것이었다. 그들 중에 희영과 같이 걸어가는 자는 없었다. 희영은 면전에서 불가능하다고 해봤자 지금 원장에게 들어 먹히지도 않을 것을 알기에 해 보겠다고 하고 나온 것이다. 이렇게 하여 희영은 혼자 연구실에 남았다. 그러나 결과는 눈에 보이는 것이었다. 목표량을 채우지 못할 것이 거의 확실해지자 그녀는 매우 초조했다. 새삼 이런 다급한 때에 자리를 비운 부하들에 대한 분노도 일었다. 그렇나 어찌할 것인가 부하들은 지금 설령 그녀에게 잘못 보여 직장 따위는 그만둬도 그 젊은 나이에는 어디 가서도 붙어먹고 살 데는 널려 있으니 아쉬운 것이 없음에랴. 그러나 반평생을 이 분야에만 종사해왔고 달리 마땅한 사회적응력도 없이 나이만 먹은 희영은 자신의 상사에게는 파리목숨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원장의 눈밖에 나면 그녀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그녀는 동료 실장들과의 사교에서도 소외되어 있어 그녀가 이런 다급한 일의 해결사 역할을 않는다면 그들에게서도 이용가치를 잃어 더이상 직장생활은 어려워질 것이다. 당장 직장에서 쫓겨나면 독신인 그녀에게는 새로 직장을 얻을 때까지 자기를 돌봐줄 남편도 없다. 오직 직장에서 자기의 자리를 유지하는 것만이 그녀의 하나뿐인 삶의 길이다. 우울한 심정으로 희영은 기계를 점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녀는 갑자기 눈을 반짝 뜨더니 멍하니 있는 것이었다. 한동안 그녀는 그대로 있었다. 다시 그녀는, 비장한 오기를 띈 큰 결심을 한 표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는 이윽고, 그녀가 지금 마음먹은 바 일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바로 이 때 그녀에게는 전 인류를 경악케 할 거사의 계획이 떠올랐던 것이었다. 그녀는 우선 자기가 관리하는 이 수 많은 여자들의 자궁 작동의 열쇠가 되는 비밀번호를 모두 자기만이 알고 있는 번호로 바꾸었다. 그리하여 아무도 이 기기의 조작을 할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혼자 긴장된 표정으로 무언가의 작업에 몰두했다. 밤 11시가 넘어 그녀의 작업실 밖에서 차 소리가 들렸다.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부하연구원 양수정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녀는 희영의 작업현장에 올라와서는 "실장님, 아니 언니 지금 할 일 많지요?" 하고는 옆에 와 앉았다. 그러나 희영은 그대로 작업에 열중하면서 "아니 필요없어. 오늘은 내가 혼자 다 할 수 있어." 했다. 희영은 계속 고개도 안 돌리고 하던 작업에만 열중했다. 양수정은 그녀가 혹 화가 난 것이 아닌가 해서 "아이 언니, 그러시지 마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하고 단말기 앞에서 비밀번호를 넣었다. 그러나 작동이 되지가 않는 것이었다. "아니, 언니 왜 안되죠? 번호를 바꾸셨어요?" 희영은 그제야 고개를 돌리고 양수정을 향했다. "만지지 말래도. 이번에 내가 혼자 아이디어를 내서 곧 놀라운 결과를 발표하려 한단다. 잘 모르고 손댔다가는 망칠 위험이 있으니 못 만지게 해 놓았다. 걱정 말고 어서 가거라. 그럼 메리 크리스마스..." "예 언니, 기대하겠어요. 메리 크리스마스." 양수정은 다시 한밤중 생산원 앞의 한적한 도로로 차를 몰고 떠나갔다. 밤이 깊어 이제 아무도 희영의 작업실에 올 사람은 없었다. 경비원들도 야간 순찰을 마치고는 실장님 수고하시라는 말을 남기고 자기들의 초소로 떠났다. 그 동안 희영이 하고 있던 일은 다름 아닌 보관자궁 중에 우수한 형질의 것을 자료분석을 통해 각 부분별로 찾아내는 것이었다. 유전자특성, 발생 羊水의 질 등 각 요소의 우열을 검색해 각각에 있어서의 최적의 것을 찾아내 부분별 최적자궁에 관한 목록을 작성했다. 이렇게 얻어진 목록에 의해 별관의 자궁실에 있는 이들 각 부분의 최적자궁들로부터 최적의 부분요소들을 원격조종으로 분리했다. 그리고 각각 모두 본관과 별관을 잇는 子宮送出路를 통해 이 쪽으로 끌어내었다. 다시 子宮異常治療機를 이용해 이들을 모두 취합하니 훌륭한 合成最適子宮의 구성이 이루어졌다. 그녀는 이것을 신생아의 子宮摘出機에서 애초에 자궁이 분리되어 나오는 통로의 출력부에 위치시켰다. 그리고 모니터 앞에서 자궁적출 프로그램을 위한 설정값을 모두 그 補數로 바꾸었다.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는 아무도 없는 것이 다시 확인되자 치마를 풀어 내렸다. 모두를 경악케 할 엄청난 일을 꾸밀 때에는 정신없이 몰두하던 그녀가, 막상 옷을 벗으려 할 때에야 혹 누가 훔쳐보지나 않을까 염려한다는 것은 아이러니 였다. 치마를 벗은 그녀는 다시 팬티를 벗었다. 그리고는 자궁적출기의 침대에 누웠다. 신생아를 대상으로 만들어진 수술대에 누우자니 그냥 걸터앉은 자세나 다름없었다. 웃저고리와 스타킹, 구두를 모두 착용한 채 쭈그린 자세로 다리를 벌려 누워있는 그녀의 모습은 여느 오래된 도색잡지(挑色雜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형태였다. 희영은 그녀의 가랑이를 최대한으로 벌리고는 자신의 음문을 자궁 분리 흡입구에 밀착시켰다. 그리고는 스위치를 눌러 자궁적출 프로그램을 역작동(逆作動) 시켰다. "윙." 작은 엔진 소리를 내면서 자궁적출기가 작동했다. 합성최적자궁은 자궁적출기의 통로를 통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보통 때는 반대 방향으로 내뱉는 통로인데 역작동 명령을 받으니, 조금은 어색한 듯 그렇게 잘 움직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또한 본래 신생아의 자궁의 적출 통로로써 이용되는 것인데, 다 자란 자궁의 조합인 합성최적자궁은 그만큼 통과가 힘겨울 수밖에 없었다. 몇 번 움찔 움찔 하면서 헛작동을 하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스르르 풀어지는 듯 하면서 합성최적자궁은 통로를 미끄러져 들어왔다. 기계가 동작하자 희영은 긴장을 느끼면서도 원활한 착상(着床)을 위해 가랑이를 다시 힘껏 최대한 벌렸다. "헉!" 둔탁하고 강한 충격이 희영의 하복부를 꿰뚫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이제까지 느껴본 어느 것보다도 강한 성적감흥을 느꼈다. 그것은 어릴 적 자위행위를 했던 때나, 자라서 시내의 성인오락실에서 단독 가상성험기를 썼을 때나, 혹은 모두들 지저분하다고 하는 육체실교접행위(肉體實交接行爲)를 시내 뒷골목에서 몰래 해봤을 때 등, 그 어느 때 느꼈던 것보다도 더한 것이었다. 육체실교접행위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는 번거롭기만 할 뿐 사실상 무의미한 것이나, 일종의 변태적 성행위로서 은밀히 성행되고 있었다. 희영은 그대로 자궁적출 침대에서 사지를 늘어뜨렸다. 그녀는 한 동안 정신을 잃고 그대로 있었다. 그녀의 음부 부위는 착상과정에서 터진 선혈이 낭자해, 그녀가 누워있는 자궁적출기의 아래 바닥으로 뚝뚝 흘러내렸다. 그녀의 기분은 비몽사몽간을 헤매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황홀경에 취하고만 있을 때가 아니라고 반사적으로 깨닫고는 곧 몸을 깨었다. 이제 당대의 여느 여자와 마찬가지로 자궁대여를 했던 희영의 몸 속에는 그녀가 선택조합한 최적의 자궁이 다시 설치되었다. 그녀의 몸은 고전적 여성인간으로 환원되었다. 자궁착상이 무난히 이루어지자 그녀는 만족한 듯 안면에 살짝 미소를 띄우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어디 보자." 혼잣말을 하면서 육안으로 내려다보기도 하고 거울을 통해 보기도 하며 자신의 하체를 유심히 보았다. 그녀가 옛 그림을 통해 보았던 고전여성의 나체마냥 그녀의 하체는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옆의 단층촬영장치로 갔다. 그녀는 단층촬영장치를 작동시켰다. 일 센티의 간격으로 자신의 하복부의 세로단면, 가로단면의 단층영상을 모니터에 비추어보니 과연 문헌에서 보았던 고전여성의 그것과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는 실재했던 여성들로서는 거의 불가능한 정도로 여러 면으로 가장 우수한 구성요소를 모아 지닌 최상의 초강력 자궁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성공적인 자궁이식을 확인한 희영에게는 그 다음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희영은 주전산기의 모니터에서 여성대여자궁의 자료체계(DB)를 검색했다. 수십억의 자료들은 모두가 연령, 배우자정보, 신체특성, 건강상태, 기타 사회이력 등이 각각의 식별자(ID)에 따라 방대한 연록(連錄:linked list)을 이루고 있었다. "애초에 내가 생명과학을 전공했던 것은 생명의 신비를 탐구하기 위해서였던 것인데 이런 일이나 하고 있다니... 신성한 인간의 생명창조를 물품생산공정 마냥 하다니... 이런 건 없애버려야 해." 희영은 화면에 나타난 자료체계도(資料體系圖)의 맨 상위로 화살표를 위치시키고 이동단추(mouse)를 눌러 처리대상을 지정했다. 그리고는 비밀번호를 넣어 초사용자(超使用者:super user) 상태로 전환시켰다. 그녀는 다시 화면상단의 사용자메뉴 하나를 끌어당기고 그 안의 메뉴 하나를 선택했다. 그것은 붉은 색 바탕에 '지우기'라고 씌어 있었다. 그녀는 비장한 표정으로 이동단추를 눌렀다. '정말 지워도 되나요?' 하는 질문이 나왔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눌렀다. 나뭇가지처럼 연이어 늘어서 있는 자궁정보집단 상자표식 들이 하나하나 사라져 갔다. 옆의 주전산기에는 자기원반(磁氣原盤)이 바삐 돌아가는 소리가 사각사각하니 요란하게 들렸다. 화면상의 자료체계가 모두 사라지고 원반장치(HDD)의 표식만이 남았다. 희영은 다시 상단으로부터 기억장치 지정 메뉴를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백업테이프 장치에서 같은 과정을 거쳐 모든 여성대여자궁정보를 지웠다. 백업테이프의 자료는 일년마다 백업저장한 것이 50벌이나 되므로 이들을 다 지우는 데 걸리는 시간은 꽤 오래 걸렸다. 한 벌이 다 지워지고 난 뒤에 다시 손으로 일일이 여러 확인절차를 거쳐 지우는 작업을 반복해야만 했다. 백업테이프들은 마지막 발악을 하듯 씽씽거리며 요동쳤다. 마침내 최후의 50년 전의 여성자궁 대여정보 기록테이프 마저도 지워졌다. 지구상의 모든 여성의 자궁운용은 이제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이것으로 모든 자료가 다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생산원 내의 20여대의 보조전산기 들에는 이들 정보가 압축형태로 저장되어 있다. 그리고 주전산기에 이상이 생기면 언제라도 모든 정보를 복원해 재가동할 수 있는 기능이 마련되어 있다. 다시 희영은 이들 보조전산기들에 차례차례 원거리접속(remote login)하여 역시 여러 차례의 확인과정을 일사천리로 넘어가며 관련정보 일체를 삭제시켰다. 그녀는 관련정보가 수록되어 있는 모든 컴퓨터의 초사용자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으므로 모든 것이 그녀 뜻대로 가능했다. 생산원 내의 모든 컴퓨터들에 대해서의 조치가 끝난 뒤에 그녀는 인터넷으로 들어갔다. 미주(美洲)에 있는 분원의 컴퓨터 안으로 그녀는 원거리접속했다. 그러나 여기서 그녀는 막막해 졌다. 자신의 사용자상태로 들어갈 수는 있었지만 이 곳에까지 초사용자 권한을 행사할 수는 없었다. 희영은 난감했다. 완전무결하게 해 놓지 못하면 꼼짝없이 자기의 신세는 범죄자가 될 수밖에 없다. 화면상의 '국립생산원 미주분원, American Branch, National Birth Institute'의 글자를 바라보며 잠시 걱정스레 앉아있던 그녀는 다시 무슨 생각이 났는지 자기의 자리로 갔다. 그리고는 옆의 서랍장 맨 밑엣칸을 열었다. 거기에는 여러 색깔의 라벨을 붙인 디스켓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었다. 그녀는 바삐 그것들을 헤쳐 가며 무언가를 찾았다. 그리고는 한쪽 구석에서 라벨이 세 번쯤 덧붙여 있고 글씨가 어지러이 적혀 있는 한 디스켓을 찾았다. "흐유, 바로 이거야. 이걸 뜻밖의 목적에 쓰게 될 줄이야. 후훗." 희영이 찾아낸 디스켓은 사 년 전에 생산원의 문서를 총 정리할 때 폐기대상 자료 중 그녀가 따로 수집한 것으로서 일천여 년 전의 성행위 기록의 복사본이었다. 현재 원본도 찾아볼 길 없는 이 자료를 자료실 당국에서는 그 가치를 인정치 않고 폐기대상으로 분류했던 것이었다. 희영은 그 때 이 디스켓을 자기의 기숙사로 가지고 들어와서 자기 방의 컴퓨터에서 벅찬 흥미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작동시켰다. 그녀는 밤이 가는 줄 모르고 이 흥미로운 옛 시대의 성풍속을 관람했다. 그것은 당대의 성풍속에 대한 반감이 많았던 그녀가 동경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녀가 그 다음 날 저녁 다시 이 즐거움을 가지려 했을 때 그녀는 단지 몇 장면만을 즐기다가 이내 포기해야만 했었다. 화면은 갑자기 삑삑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찌그러지더니 이내 꺼져버렸다. 다시 그녀가 컴퓨터를 켰을 때는 삐익 하는 요란한 소리가 울리면서 화면에는 그저 검은 바탕에 회색의 큰 글씨로 '暗黑魔王電算菌 침투완료' 라고 씌어 있을 뿐이었다. 암흑마왕전산균은 당대의 어느 백신제작가도 치유법을 개발하지 못한 최악성 전산균으로서 일단 어느 형태로라도 이것에 감염된 디스켓을 읽은 컴퓨터는 하루 내 어느 임의의 시간에 동작이 정지하고 모든 정보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컴퓨터 자동운전시스템의 프로그램 오류로 인해 아내와 두 딸을 잃은 한 천재 과학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만든 자도 곧 자살해 버렸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책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이것이 발견되면 곧바로 디스켓과 컴퓨터를 폐기처분 해야 하며, 그러한 조치를 하지 않으면 전산관리법에 의해 법정 최고형인 2년의 징역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그녀는 이 디스켓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이 디스켓의 내용을 자신의 연구실에서 수시로 분석하며 몰래 해독(解毒)의 방안을 연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희영은 디스켓을 주전산기에 넣었다. 그리고는 디스켓의 내용을 생산원내 전 컴퓨터와 전세계 각 분원의 수십 대의 컴퓨터를 향해 합송전문(合送電文)으로 보냈다. 전산균이 배포된 모든 컴퓨터 중 하나만 발병(發病)하더라도 곧바로 통신망을 통해 다른 모든 곳도 증세가 나타날 것이므로, 효과를 기대하는 시간은 하루가 아닌 두어 시간이면 충분할 것이다. 무사히 송신되었음을 확인한 후, 희영은 초사용자 상태 그대로 주전산기의 최상위 근간방(根幹房)에 화살표를 위치시켜 처리대상을 지정했다. 그리고는 상위의 붉은 메뉴를 선택했다. 무려 열 여섯 번이나 확인 질문이 경고음과 같이 나왔지만 그녀는 더이상 귀찮은 듯 거침없이 '그렇다'로 일관하며 이동단추를 눌렀다. 어차피 전산균의 침투로 곧 파괴될 운영체제이지만 이 김에 분명한 확인을 눈앞에 보고 싶어서였다. 동작소프트웨어는 휘하에 거느리는 모든 것을 지우고는 종국에는 그 자신을 지웠다. 전산기는 정지하고 화살표도 깜빡이지 않았다. 이것으로 전인류여성의 출산을 대신해 주던 국립생산원의 방대한 설비는 더이상 동작하지 않게 되었다. 다음 날 아침 출근한 원장은 희영이 밤새 야근하고 숙직실에 가 있는 것을 알고는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신실장. 어때요? 결과는 잘 나왔소?" 그러나 희영은 "죄송해요, 원장님, 호홋. 저 피곤해서 이만 좀 쉬어야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원장은 평소에는 자기한테 그렇게도 쩔쩔매기만 했던 그녀가 예상치 않은 태도를 보이자 적잖이 당황했으나 일단 결과가 더 걱정되는 것이므로 곧 종자수정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원장은 종자수정실로 들어섰다. 그가 나타나자 거기 있던 연구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원장님 큰일났습니다. 기기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전반적인 운영체제가 모조리 파괴되었습니다." 하고 모두들 심각하게 원장을 향해 말했다. "아니 어쩐 일이오?" 원장은 퍼뜩 머리에 스쳐 오르는 예감이 있었다. 그러나 역시 수습부터가 급선무이므로 "그렇다면 빨리 보관되어있는 예비 운영체제를 설치해 작동해야지 뭘 하는 거요?" 하고 멍하니들 서있기만 하는 연구원들을 향해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이들 중의 선임자가 대답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더라도 이미 저장되어있는 여성대여자궁정보(女性貸與子宮情報)가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백업테이프의 정보 또한 모조리 파괴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어서 미주분원에 연락해 그곳의 백업을 가져와야 하지 않겠소?" "그곳에도 방금 연락해 보았습니다. 그곳도 난리가 났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바이러스가 침투해 그곳 시스템의 모든 정보가 사라졌다 합니다. 거기 있는 백업 테이프는 오십 년 전의 여성들에 관한 자료라서 현재는 쓸모가 없다고 합니다." 아무리 방대한 설비가 파괴되었다 하더라도 설비 그 자체는 당시의 발달된 지구연방의 과학기술과 재력으로는 다시 복구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정보가 유실되어 생산능력을 잃은 이 전인류여성의 자궁은 어찌할 것인가. 국립생산원에서의 출생과 동시에 모든 여성의 자궁은 위탁되어 공동으로 관리되어 왔던 것이다. "이. 이를 어쩐다..." 원장의 벗어진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평소의 그의 모습은 안경너머의 눈매는 차가우면서 입가에는 여유만만함이 깃들어 있는 것이었는데 이런 당황스런 모습은 그에게 어울리는 것이 아니었다. 원장은 곧바로 숙직실로 향했다. 그는 간부 몇 명과 경비원들을 대동하고 황급히 여직원 숙직실로 들어가 아직 졸린 표정으로 누워있는 희영을 불러 깨웠다. 남녀유별 따위 의식할 상황이 아니었다. "신실장 어찌된 일이오? 다시 복원할 길은 없소?" 숙직실 구석 침대에서 속옷 바람으로 이불을 걷어찬 채로 누워 있던 희영은 눈을 반쯤 뜨고 기지개를 켜며 부시시 일어나고는 그대로 비틀거리며 원장을 향해왔다. 그러더니 털썩 그를 끌어안으며 "그거... 이제 안돼요, 아저씨, 아니 오빠. 모든 것은 다 결딴났어요." 술에 취한 듯이 혀 꼬부라진 목소리를 냈지만 전날 그녀가 술을 마신 것은 아니었다. 단지 원장을 비꼬아 조롱하는 의도가 역력했다. "이 여자가 미쳤나?" 원장은 멈칫하며 물러섰다. 옆에 있던 경비원들과 간부들이 그녀를 붙잡아 떼어냈다. 간부들이 그녀에게 "어서 옷을 입고 같이 나갑시다." 하니 희영은 "에이 귀찮게 뭘... 뭐 물어볼 말 있어? 그러면 그냥 나가지 뭐." 하고 걸음을 옮기려 하자 "희영언니 그러지 말고 제발 좀 정신차려요!" 평소에 그나마 그녀에게 친절히 대했던 별관 연구동의 인종연구실의 조진숙 실장이 그녀에게 타일렀다. 희영은 그제서야 비시시 웃으며 옷을 입고 나왔다. 그들 모두는 원장실 옆의 대회의실로 향했다. 그녀를 앉혀놓고 모두들 심각한 표정으로 대책을 숙의하려는 것이다. 대회의실은 생산원 안의 전 간부직원들이 소집되어 이 심상치 않은 일에 대해 삼삼오오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원장 일행이 들어오자 주요간부들은 자리에 앉았다. 희영도 가운데의 자리에 얼른 끼여들어 앉았다. 희영은 많은 남녀 간부들 앞에서 치마 차림으로 무릎을 들어 앞의 탁자에 발을 올려놓고는 "모든 것은 다 소용없어. 내가 이 분야 일을 일이 년 해봤어? 나보다 이걸 더 많이 아는 자가 누구 있어? 이미 모든 가능한 복원장치를 다 없앴어." 하며 소리 높여 지껄여댔다. 처음에는 이 여자가 정신이 이상해진 것이라고만 생각하던 일동도 점차 그녀의 발설이 논리정연하고 그녀가 시스템의 모든 상태를 속속들이 알면서 그 기능마비를 의도적으로 한 것이라는 게 확연해지자, 모두들 이 엄청난 재앙에 크게 동요하면서 서로의 표정들은 심각해지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이윽고 한 간부가 "그 그렇다면 앞으로 인류는 우리 대를 끝으로 멸망하고 마는 것이 아니오?" 하고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희영은 고개를 젖히고 크게 웃어제끼면서 "호호호, 그런 걱정일랑 하지 마세요." 하고는 흐트러진 자세 그대로 갑자기 치마를 올리고 내의를 걷어내려 그들 모두에게 자신의 하반신을 내 보였다. 옆에서 보던 동료간부들은 그녀를 제지하려는 듯 손을 내저으며 "이 이게 또 무슨 망측한 미친 짓이오!" "화장실은 조금만 걸어가면 되는데 여기서 용무를 보려 하다니..." 했다. 그러나 남자 간부들은 계속 말로만 따지는 것이었다. 이 와중에서 한 여자 간부가 그녀에게 접근해 그녀를 손으로 잡으려했다. 그러자 희영은 휙 하니 뿌리치고는 네까짓게 무얼 참견하느냐는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접근했던 여자는 곧 물러서고 말았다. 그리고는 그녀는 오히려 가랑이를 더욱 벌리며 크게 소리질렀다 "봐! 보란 말야! 이 멍청이들아!" "..." "어휴. 가까이 와서 자세히 보라구 이 한심한 연놈들아!" 민망해 하면서도 워낙 상황이 상황인지라 가까이 와서 그녀의 하체를 유심히 보던 몇몇 간부들은 한동안 의아해 하다가 오래지 않아 뭔가 다른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의 아랫배는 당대의 여느 여자와는 달리 봉긋하니 솟아나 있지를 않은가? 그녀의 몸은 완전한 고전여성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원장과 그들 모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종합출산관리시스템이 파괴된 이 지구상에 자궁을 가지고 있는 여자는 오직 희영 그녀 한 사람 뿐이다. 이 사실은 곧 지구연방 대통령에게도 보고되고 긴급뉴스로 지구 전역에 보도되었다. "이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지구연방 대통령과 모든 국민 다 희영의 이 엄청난 행위에 크게 분노했다. 여기저기서 모임을 갖고 대책회의도 하고 성토대회도 벌어졌다. 시민단체들은 성명을 발표했다. "사태가 이렇게 된 책임자는 누구인가? 철저히 가려 엄벌에 처해야 한다." "아니, 생명의 존엄성을 등한히 했던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과학기술연합회 또한 그들 나름대로의 성명을 발표했다. "제멋대로 임기를 연장하며 안일하게 국립생산원을 운영해온 원장의 파행경영이 이런 사태를 불렀으니 원장은 물러나야 한다." 한편 야당에서는 "아니, 대통령의 부덕의 소치이니 물러나야 한다." 하는 등 말이 많았으나 모두가 이제는 헛된 것임은 물론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인류의 명맥을 이어가야 하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었으므로 어느 누구 하나 희영을 함부로 하지는 못했다. 아니 그들이 곧 진정국면으로 돌아오자 그들은 인류의 장래에 대한 열쇠를 한 손에 쥔 희영을 귀하게 모시는 것밖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를 갖지 못했다. 연방정부에서는 혹시나 정신착란자가 그녀를 해할까 철통같은 이중 삼중의 완벽한 경호를 취했다. "희영씨가 각하를 만나잡니다." 지구연방 대통령은 어느 날 보고를 받았다. 물론 그녀를 만날 수밖에 없었다.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들어온 희영은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와서는 농익은 암내가 풀풀 나는 엉덩이를 털썩 가벼운 먼지를 내뿜으며 소파 위에 갖다 붙였다. 그녀는 예의 그 흐트러진 자세로 담배를 꼬나물며 여유를 부리더니 "각하한테 한가지 청이 있습니다." 하고는, 피우고 있던 담배를 소파사이에 놓인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리고는 두 손을 모아 턱에다 갖다 대고 한쪽 눈을 살짝 윙크하듯 흘겼다. "어서 말해 보시오. 내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모든 권한을 행사해서 그대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다해 주겠소." "호호. 각하의 권한이라 하기에는 좀 뭣한 건데요.." "글쎄 권한에 좀 벗어난다 해도 권력을 가진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대를 위해 무엇인들 못하겠소? 이 지구 이 인류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것이 내 선거 공약이고 국민과의 약속 아니겠소?" "훗. 국민과의 약속을 반절쯤 저버리셔야 합니다." "아무튼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해 주겠으니 어서 말이나 해 보시오." "그렇다면. 흠. 말을 해 드려야죠..." 희영은 자세를 제법 고쳐 앉더니 "각하는 십 년 동안 전 지구 국민을 위해 일하겠다고 하셨죠? 지금 약속의 반은 지키셨지만 앞으로 오 년은 지키지 못하셔도 괜찮겠죠?" 하고 살짝 올려보며 도톰한 그녀의 입술 모양을 말하던 그대로에서 머무르게 했다. "그러니... 그대는..." "오호호. 그래요. 이제는 부족한 제가 이 자리에 앉아보아야 하겠어요." 대통령의 흰 머리카락은 잠시 흔들리는 듯했다. 그의 불그스름한 얼굴에는 순간적인 경직이 일어났다. "으음. 나 하나 자리 잃는 거야 이 지구를 위해서라면 서운하지 않소. 결코 자리에 연연해 하지는 않소. 그렇지만 그대가 집권한 뒤 군부가 그대 말을 잘 따라 줄지가 의문이오. 군부의 장악력이 권력의 성패를 좌우하는 거요. 결코 이 자리만 얻는다고 되는 일이 아니오." "오호홍! 원 걱정도 많으셔. 제가 조직생활을 일이 년 해봤어요? 조직을 장악하려면요 모름지기 순서가 있는 법이죠. 바로 어제 저녁에 지구방위 총사령관 집에 가서 총사령관과 주요 육해공 참모장 등 모두 모이게 해서 다 만났어요. 그네들하고 한바탕 신나게 놀면서 앞으로 내가 낳을 아이는 당신네들 아이를 우선으로 하겠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모두들 신이 나서 저보고 원하는 대로 다 밀어주겠다고 했어요. 모두들 저만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행여나 자기가 빠질까봐 초조해 하는 꼴이란... 참 재밌었어요. 모두들 제 아랫배가 도대체 어떻게 생겼냐고 하도 궁금해해서 보잘것없는 제 몸매지만 홀라당 빨가벗고 한 차례 나체쇼도 해 보여 줬죠. 킥킥." "그 그만. 아 알겠소. 아참, 그런데 나도 좀 끼워 줄 수는 없겠소?" "잘 협력하신다면 지금이라도..." 이렇게 말하며 희영은 다시 살짝 눈짓을 하며 제법 고혹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앉은자리에서 치마를 사르르 걷어올리고 팬티를 살며시 내려 희뿌연 알궁둥이를 노출시켰다. "제발 그만하시오. 여기서 뒤를 볼 생각이란 말이오?" "어? 아닌데요. 그냥 각하의 씨를 받아보려는 것인데요." "그러려면 그대가 근무했던 국립생산원에 있는 나의 종자를 수정받으면 되지 않소? 그대가 너무 순진하게 옛날식의 사랑에만 미련을 두고 있기에 결혼을 못하였다고는 익히 들었소만..." "아차. 참 그렇지..." 까불짝거리던 희영도 멋쩍었는지 얼굴이 빨개지며 다시 팬티를 걷어올렸다. 그녀는 다시 똑바로 고쳐 앉아 눈을 반뜩이며 대통령의 얼굴을 가까이 쳐다보고는 "어쨌든 약속하시는 거겠지요?" 하고 물었다. 대통령은 대답했다. "그대가 원하는데 낸들 어쩌겠소? 내 곧 하야 담화를 발표하겠으니 아무쪼록 잘 좀 해 보시오. 부탁하오." 그날 저녁 지구연방 전역의 영상기 방송에는 내일 오전 10시에 대통령의 긴급 특별담화가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음 아마도 대통령의 하야 성명이겠지. 그럼 드디어 우리가..." 지난번 선거에서 패한 야당 진영에서는 드디어 자신들에게 기회가 왔다고 두근거리는 기대로 다음 날의 특별담화를 기다렸다. 그 동안 크고 작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이 문제의 원인은 대통령의 부덕의 소치이니 물러나야 한다는 성명을 계속 발표하곤 했는데 이번의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사건이니 정말로 할 말이 없으리라고 여겨졌다. 그런데 다음날 대통령의 성명은 정말 그들에게 뜻밖이었다. 하야는 분명 하야인데 자신의 후계자로 바로 전지구 유일의 자식생산능력자인 희영을 옹립시키기로 했다는 것이다. 야당 당수는 즉각 반박성명을 냈다. "안된다. 국민 뜻도 묻지 않고 밀실에서 저희들끼리 대통령직을 주고받는 행위는 국민의 이름으로 결코 용납할 수 없다." 그리고는 전 지구 국민의 의사를 묻는 국민투표를 할 것을 촉구했다. 이들의 반발활동은 거세어 한동안 전 지구의 모든 민주인사들이 거의 다 가담할 정도였다. "아이, 어쩌나..." 먼젓번 대통령의 하야 즉시 자리를 물려받았던 희영은 몹시 당황했다. 군부의 지지만을 얻으면 다 원활히 될 줄로 알았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니 어찌해야 좋을 지 몰랐다. 그녀는 자기의 자리가 얼마나 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싸였다. 이러자 그녀는 지금 자리에 있을 때 어서어서 하고 싶은 바를 실행해 보자고 마음먹었다. 희영은 서둘러 담화를 발표했다. "이제 전 여성들의 숙원인 여성위주의 사회건설에 착수해 여성만을 위한 새로운 혁명적인 정책을 펴 나가겠다. 앞으로 가정을 포함한 모든 곳에서 전통적인 남자의 기득권은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곧바로 모든 법률에서의 남자의 기득권이 있는 조항을 과감히 삭제시키고 이에 따르는 모든 사회적 관습들도 철저히 배제시키는 개혁을 해 나갔다. 당시에는 모든 사회활동에서 남녀의 활동영역의 구분은 없었다. 단지 남자의 위치를 받쳐주는 것은 이전부터 이어 내려온 각종 법률과 사회관습들 뿐이었다. 대다수의 여성들은 이러한 불평등에 대한 불만이 없을 수가 없었다. 희영의 거침없는 당찬 개혁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자, 당초에는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희영의 당돌한 행위에 당혹해 했던 지구상의 모든 여자들도 쌍수를 들고 희영에 대한 지지로 돌아섰다. 야당당수의 부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야당당수는 그의 부인에게 국민투표 서명운동에 함께 참여하자고 했다. 그러자 그의 부인은 "그것은 거절하겠어요. 저는 솔직히 희영 대통령의 새 여성정책이 이루어지길 오히려 바라는데요." 하는 것이었다. 놀라고 당황한 야당 당수는 그의 부인에게 다시 호소했다. "여보 우린 대통령 자리, 아니 당신의 제일숙녀(第一淑女) 자리를 얻기 위해 그 동안 얼마나 피눈물나는 노력을 쏟았소? 이제 절호의 기회가 온 거요. 어서 이 기회를 잘 활용해 나는 대통령 당신은 제일숙녀의 자리에 앉아, 그 동안의 고생을 보상받고 안락하고 품위 있는 여생을 보냅시다." 그러나 결국 그의 부인은 "당신을 섬기는 제일숙녀보다는 여성해방사회의 한 평범한 여인이 되겠어요." 하고 마는 것이었다. 다른 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여성들은 자신의 남편보다 희영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우선되었다. 희영을 지지하지 않는 남자와는 일체의 교제를 하지 않으며 기존의 남편이라면 가차없이 이혼했다. 지구상의 모든 남자들은 희영을 지지할 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이리하여 그녀는 대통령의 자리를 다시 굳건히 유지할 수 있었다. 그와 더불어 그녀의 대 개혁은 계속 과감하고 거침없이 진행될 수 있었다. 다시금 용기를 얻은 그녀가 그녀의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될 야심찬 국가정책의 추진을 기획하려 하니, 넘겨받은 자리의 잔여임기가 앞으로 5년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그녀의 측근각료들과 집권연장을 의논할까 했다. 그런데 좀처럼 기회는 오지 않아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러던 중 다음 해의 연두 기자회견에서 그녀는 기자들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후계자 양성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려 하십니까?" 이 말에 희영은 심히 불편한 표정을 하며 "아직 생각해 본 바 없소이다." 하고 잘라 말했다. 회견장은 어색하고 뒤숭숭한 분위기가 되었다. 집무실로 돌아온 그녀는 분한 생각까지 들었다. "임기가 몇 년이냐고? 나는 종신 이 자리에 있어야만 한다." 희영은 보좌관을 불렀다. "내 임기를 무제한으로 바꾸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그러자 보좌관은 대답했다. "각하. 현직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를 무제한으로 연장하는 것은 민주사회가 제대로 정착되기 이전의 관행이고 현대사회에서는 그러한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어쩌란 말이에요? 나 말고 누가 이 자리를 맡는단 말이에요?" "각하가 계속 집권해야 하리라는 것에 저도 동감이지만 제도가 그에 맞지가 않습니다. 저도 난감하네요. 어떻게 해야 할지..." "그놈의 제도가 무슨 소용이라고 그래요?" "아니죠 제도는 바로 인간사회의 기틀을 이루는 것으로서 지도자의 권력도 그 바탕 위에서나 있을 수 있는 것이죠." "흠. 그렇다면..." 희영은 보좌관을 물러가게 하고 다시 골똘히 생각했다. 그녀는 지나온 자신의 젊은 시절을 돌이켜 보았다. 떠오르는 것들이라곤 틀에 박힌 현대 사회가 주는 답답함과 조직내의 인간관계에서 서로간의 온갖 미움과 다툼이 주었던 고통들뿐이었다. "내가 살아온 기간의 기억만 더듬어도 이삼십 년 전쯤엔 훨씬 지금보다 사람이 운신할 수 있는 마음과 공간의 폭이 넓었어. 그러니 백년 전 이백 년 전쯤에는 얼마나 지금보다 여유가 있었을 것이고 하물며 천년전 이천 년 전쯤에랴. 앞으로 이대로 계속 더 인류사회가 나아간다면 백년 후 이백년 후 그리고 몇천 년 후에는... 생각만 해도 끔찍해." 그녀는 혼자 푸념했다. "자유로이 날아야 했을 내 청춘의 나래를 붙잡아매어, 이렇듯 무미건조함만으로 일관되게 만든 현대 사회제도가 싫다." "아예 이 기회에 내가 그 동안 막연히 바라기만 했던 사회를 실현해 보는 것은 어떨까..." 한참을 더 생각하고 나서 희영은 무언가 깨달은 듯 책상을 쿵 치고 일어섰다. 그녀는 승리의 만세라도 되는 듯이 "나는 여왕이다. 아니 예전의 그런 흔한 여왕이 아니고 지구상에 전에 없었던 신격(神格)의 유일한 여왕이다." 하고 혼자 외쳤다. 기실 그녀는 이전부터 대통령이나 국가원수의 칭호에 만족하지 않았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마침내 제도 자체를 바꾸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녀는 곧 담화문을 발표했다. "이제까지 지구연방의 통치지침이 되었던 공화정을 폐지하고 왕정을 복원한다." 그녀의 발표가 있자 이에 대한 충격은 실로 엄청났다. 이제까지 그녀를 따르던 진보, 급진 여성주의자 등을 비롯한 대다수가 그녀를 향해 화살을 퍼부었다. "이러한 발상은 시대착오적이며 역사역행적이다." "개인의 영달을 위한 제도 변경이 갈 때까지 이르른 것 아니냐?" 한동안 다시 희영의 대 개혁작업이 차질을 빚는 듯했다. 그러나 이것도, 이윽고 가진 희영과 진보여성주의자대표단 간의 대면 이후에는 잠잠해 질 수 있었다. "그대들이 미련을 갖는 공화정의 강점이 무엇이오?" 희영은 대 접견실에 가로로 일렬로 정렬해 앉아 있는 여성대표들에게 물었다. "그야 모든 인민이 동등한 권리를 부여받으면서 서로가 동등한 행복의 권리를 추구하도록 하는 제도이기 때문 아닙니까?" "거기에 함정이 있는 것이야. 모두가 다 동등한 권리를 얻어야 한다고 하니까 모두들 자기 분수를 모르고는 남의 위에 올라서고 자기 것을 챙기기 위해 나서고 날뛰게 되지. 그래서 결국은 함부로 완력을 쓰는 비열한 부류의 남자들이 자기 것을 많이 차지하게 되고 말지. 그런데 그러한 제도의 기초가 되는 사상을 주창한 자들이 누구더라?" 희영은 의자를 앞뒤로 흔들흔들 하면서 한 손에 기구를 쥐고 툭툭 손톱을 깎으면서 그들에게 물었다. "그야 죤 로크, 쟝 쟈크 루소, 제레미 벤담, 죤 스튜어트 밀 등입니다."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희영은 얼굴이 붉으락해지면서 주먹을 들어 앞의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이 바람에 깍은 손톱조각들이 앞에 나란히 앉은 이들의 얼굴에까지 튀었다. "그들 모두가 다 남자 아냐? 자기네들 입장으로만 쓴 것이지!" "이제는 나의 모성을 발판으로 전에 없는 방식의 새로운 통치를 시작하겠다는데 웬 말이 많소?" 참석한 진보여성주의자 대표들 모두가 평소에는 과격성발언을 일삼았던 이들이라 이 말에 무슨 토를 달아 자기네들의 선명도를 낮출 여지가 없었다. 아니 모두들 마음속으로 지당하다고 느껴지기도 하는 탓에 그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는 "저희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앞으로는 각하의 하시는 일에 다시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했다. 희영은 "응. 그래 알았어. 다음부터는 각하라 부르지 말고 폐하라고 불러야 한다." 하고 그들을 돌려보냈다. 이러한 진보여성주의자대표단과의 면담내용에 대한 보도가 나가자 전 지구의 모든 여성들도 공감했다. 가장 설득이 만만찮은 류의 여자들인 이들 대표단도 수긍하는데 일반여성은 말할 나위 없었다. 이리하여 희영의 재 취임식 아니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먼젓번 취임식을 하던 원형식장(圓形式場)에서 다시 했는데, 그녀의 의상부터가 달랐다. 몸에는 빨간 망토를 걸치고 머리에는 박물관에서 서둘러 가져온 금관을 눌러썼다. 그리고 왼손에는 끝에 주먹만한 다이아몬드가 금장식과 함께 달려있는 지팡이를 쥐고는 금빛옥좌에 앉았다. 화려히 빛나는 금관과 망토사이에 희끗이 보이는 그녀의 얼굴과 양손 그리고 정강이가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과히 역겹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녀의 모습과 식장주변의 치장이 모두 동화적인 환상의 분위기를 자아내니 감성이 메말랐던 당시대인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누구도 차마 대놓고 악의적으로 평할 엄두가 안 나는 것이었다. 무사히 왕위에 오르게 된 희영은 이제 기존의 사회체제 내에서의 개혁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체제를 바탕으로 하는 인류사회의 근본적 개혁에 착수할 수 있게 되었다. "여왕? 음, 되고 보니 좋긴 한데 명칭이 너무 평범하다." 여황제(女皇帝)로 부를까 해보니 너무 정형화된 명칭이라 속 들여다보이는 느낌이 났다. 그렇다고 다른 쓸만한 글자도 없었다. "어떡하나, '여군(女君)'? 피이, 그건 여왕보다 오히려 격이 낮지... 그럼 '여제(女帝)'라고 할까? 아냐, 이건 전 지구 여러 민족을 패권으로 장악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니 사랑과 모성에 의한 통치를 꿈꾸는 나의 갸륵한 마음과는 맞질 않아." 결국 가장 알맞는 자는 '皇' 밖에 없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우주가 있음으로 해서 그 중에 지구가 가장 귀하고 지구가 있음으로 해서 그 중에 사람이 가장 귀할진대, 또한 사람이 있음으로 해서 그 중 가장 귀한 진녀(眞女)가 되고자 함이라." 희영은 자신의 지위를 천지인(天地人) 삼황(三皇)과 동렬(同列)의 신격화된 왕의 뜻으로 여황(女皇)이라 칭했다. 이 때 그녀의 나이 38세였다. 그리고 자신은 최초의 여황이라 하여 시녀황(始女皇), 정식의 호칭으로는 자신의 본명 '姬英'을 '熙永'으로 바꾸고, 희영대시녀황(熙永大始女皇)이라 했다. 역시 야사의 내용은 아니나 다를까 지극히 치우친 사고방식으로 시대의 대 구주(救主)를 폄훼시키려는 구절이 곳곳에 눈에 띤다. 그러나 어느 시대 어느 때라도 이러한 부류의 잉여인간들은 있게 마련이다. 그들은 어찌해서라도 현실의 가치체계를 뒤집어 생각해보고 싶어하고 이러한 생각을 퍼뜨리는 데에 변칙적인 희열을 느끼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들은 역(逆)으로 자신들과 공감가능한 인간류를 역사의 흐름 안에 억지로라도 집어넣음으로써 자신들과 같은 류의 존재가치를 찾아보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의 존재 사실은 학부대신 아림과 같이 이야기의 흐름에 어떤 내용 있는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므로, 이들에 관한 언급은 더 이상의 의미가 없어 이만 그친다. 이 존귀하고 성스러운 여황국의 구성원 중에 인간 말종의 비율은 전생인류 시대의 경우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다. 그도 그럴 것이 전생인류 시대에 이러한 인간류들의 주된 발생원이었던 남자들이 모조리 숫사람으로서 황궁 내의 소수의 씨내리들로만 남았으니, 본질이 여자인 일사람들 중에서 그러한 자들이 훨씬 적게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한 차례 번갯불이 소화각의 창문을 번쩍 하고 밝게 비쳤다. 화자이자나미는 깜짝 놀라 손에 책장을 잡은 채 몸을 움찔했다. 하마터면 이 귀중한 책의 책장을 훼손할 뻔했다. 조금 있다 우르릉 하는 소리가 상당히 먼 곳에서부터 들려왔다. 늦가을 비는 조금씩 그 강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6) 새 時代의 開幕 이제 더이상 野史의 이야기는 없다. 天命에 의해 卽位한 熙永大始女皇에 의한 새 歷史만이 펼쳐지는 것이다. 새 歷史는 곧 이제까지 그리도 오래도록 豫見되어 오기만 했던 宇宙가을 後天開闢의 大歷史를 意味한다. 萬 女性의 時代를 여는 새 國家의 이름은 始女皇의 나라라 하여 始女皇國에 '꽃 花'자를 보태어 始花女皇國이라 하니 人間事 모든 일의 곳곳에 아름다움을 賦與하고자 하는 그녀의 갸륵한 마음이 어린 것이라. 始女皇은 年號를 惠元이라 하니, 惠元 元年은 곧 後天開闢 元年으로서 人間尊重과 思想統一의 大道時代로서의 첫 해이다. 이 때 始女皇의 나이 三十歲였다. 惠元 元年 劈頭부터 始女皇의 새 世上 만들기는 始作되었다. 半生을 보낸 現代 組織社會 內의 人間 相互間 온갖 疾視와 軋轢의 얽힘은 天性이 至純至潔한 始女皇의 心中에 不淨스런 얼룩을 숱하게 남기었으매, 昨今의 人間社會에 대한 그녀의 幻滅은 當然스러운 것이었어라. 그리하여 始女皇은 人間의 混濁汚染 以前의 옛 制度에 對한 그녀의 憧憬에 말미암아, 이에 基礎하여 새로운 時代에 必要한 새로운 統治理念을 還元定立코자 하는 것이라. 惠元 元年 그녀는 布告令을 發表했다. "全 地球의 모든 歷史書를 불사르라!" 全 地球의 歷史學者를 비롯한 모든 知識人들은 驚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나온 歷史를 거울 삼아 보다 나은 未來를 만들기 위해 歷史의 硏究가 있는 것 아닌가?" "過去의 不合理한 慣行, 無數한 施行錯誤를 앞으로의 人類歷史에서 다시 되풀이하라는 말인가?" 始女皇은 이들에게 敎示하기를 "아니다. 太初의 母系社會에서는 서로의 사랑에 바탕한 純潔하고 高貴한 人間의 삶이 있었다. 그러나 男性의 父系社會로 轉換된 이후의 歷史時代에서 男子들은 서로 相對方을 죽이고 自身이 살기 위한 術數만을 쌓아올리기에 급급했다. 그 結果 人間의 삶은 갈수록 低級하게 墮落하기만 했다. 사랑에 빠진 자가 苦痛과 不幸을 當하는 記錄을 보고 사랑을 忌避하게 되었다. 敗者에게 寬容을 베푼 뒤에 敗者에게 復讐 當하는 記錄을 보고는 勝者는 더 以上 敗者를 寬容 안하게 되었으며 血肉間의 王位다툼과 骨肉相爭의 記錄을 보고는 더 以上 血肉도 믿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黃金의 時代로부터 鐵의 시대로 墮落한 西洋의 歷史나, 堯舜의 時代로부터 戰國의 시대로 墮落한 東洋의 歷史나 共通되는 事實이다." 하니, 이 말을 듣고 歷史學者등 모든 知識人 들은 그 事理맞음을 깨닫고는 默默히 그네들의 轉業의 準備나 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太初의 失落園以來 記錄되어온 모든 男性爲主의 歷史는 抹消되고, 이어서 새로 태어나는 世代에게는 旣存의 歷史를 敎育하지 말도록 했다. 지구의 역사는 이제 다시 새로이 시작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이로부터 지구의 역사는 초기화(reset)되고 말았다. "전 지구의 모든 사회과학서를 불사르라." 전 지구의 사회과학자들을 비롯한 모든 지식인들은 더한층 경악했다. "인간사회의 유지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이들 인문 사회과학서 아닌가?" "인간의 자유와 권리에 대해 기술한 이들 문헌의 참고가 없이 어찌 복된 인간의 미래를 약속할 수 있단 말인가?" 시녀황은 이에 대해 교시하기를 "아니다. 이제까지의 인간사회는 남자들에 의해 지배되어 오면서 그들은 그 지배의 힘을 생명에 대한 逆作用의 방법으로써 얻어 왔다. 작게는 가정 내에서의 아내와 어린이에 대한 구타로부터 크게는 불복종자에 대한 誅殺에 이르기까지 남자들은 상대에 대한 危害로서 그들의 지위를 지켜왔던 것이다. 그로 인해 남자들은 서로간에 더 강한 지위를 얻기 위해 경쟁적으로 상대방에 대한 공격을 일삼았고 이러다 보니 때로는 서로가 같이 살아남기 위해 어느 정도의 타협도 필요하게 되었다. 앞으로의 세상은 生命昻揚의 은덕을 그 다스림의 근간으로 삼는 모성통치시대가 될 것이다. 그러한 시대에는 이들 紛爭妥協案 문서들은 필요치 않게 될 것이다." 하니, 이 말을 듣고 모든 지식인들은 또 한번 수긍했다. 사실 이미 그녀가 이런 포고령을 내린 이상, 어차피 시녀황의 나라에서는 그들의 사회과학 연구의 바라던 바 목적을 이룰 기회도 오지 않을 것이니, 그들은 순순히 이들 학문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이리하여 이제까지 전 지구 인류사회의 구성지침이 되어왔던 모든 사회과학서는 불살라지고 파기되었다. 로크의 인간오성론, 루소의 사회계약론, 벤담의 도덕 및 입법의 제원리, 밀의 자유론 등이 모두 이에 포함되었다. 어찌 보면 이들 문헌들과 그의 저술자들은 희영이 지적한 남성지배사회의 특질과 관련이 적을 수도 있었다. 나이 육십이 되어서 삼십년간 말도 제대로 못 건네던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다가 거절당하거나, 지독히도 여자를 후리지 못해 결국 애 둘 딸린 유부녀의 後夫가 되거나 하는 등, 남자의 一般主向에는 어긋나는, 당시에는 이미 절멸된 부류의 자들의 기록이었다. 그렇지만 바로 그 때문에 더욱 희영의 대개혁에는 방해가 될 수가 있었다. 남자란 본디 탐욕의 게걸스러움으로 뭉친 즉흥 반응적 단세포체가 아니던가? 아무튼 남자들이 만든 집단사회의 통치이념은 이제 필요하지 않았다. 오직 여황의 모성만이 이 온 지구의 백성을 통치하는 근간이 되는 것이다. "전 지구의 모든 살상무기를 폐기처분하라." 제 아무리 절대권력자의 자리에 오른 희영대시녀황이라 할지라도 어찌 이런 엄청난 일을 단숨에 명령해 이루어지게 할 수 있었겠는가? 희영은 이 거사의 계획을 결심한 다음, 지구연방 방위사령관 아니 시화녀황국 군부대신을 자신의 집무실로 불렀다. 곧 희영의 집무실로 건장한 체격의 중년사내가 가슴과 어깨에 五星 계급장을 붙인 모습으로 들어왔다. "어인 일로 폐하께서 小臣을 부르시나요?" 사령관의 말투는 어색했고 조금 비꼬는 듯도 했다. 엉뚱하게 대통령을 왕으로 바꾸고 장관, 사령관들의 직함들마저도 바꾸니 지나치다 싶게 생각되었던 것이었다. "여쭈어 볼 것이 있어 불렀다네. 지금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를 비롯한 각종 첨단 무기들은 무엇을 위해 있는 것인지 알고 싶네." "그야 외계로부터의 침입이 있을 때 우리의 영토를 방위하기 위한 것 아닙니까?" "최근에 외계로부터의 침입의 기미가 있었나?" "그건... 아직 없지요." "침입이 있다면 무슨 수로 막겠나?" "그야 침입하는 적의 우주전함은 핵 로켓을 쏘아 올려 파괴하고, 지구에 상륙하는 적의 전차는 광자포로 격퇴하고, 쳐들어오는 적의 병사는 광선총으로 처치하고 또 또..." 희영은 가소로운 듯 미소를 지으며 다시 물었다. "그들 외계인들이 그런 방식으로 침입할 것이란 건 어떻게 알았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들이 우주 전함으로 우리 눈에 보이게 우리에게 서서히 접근하고, 바다에 착륙한 다음에 전차를 이용해 뭍으로 올라오면서 침입하고, 전투병 각각이 우리 앞에 걸어들어 온다는 각본은 어떻게 되어서 만들어진 것이냔 말이오?" "그야 인간의 전투방식이란 다 그런 것이 아닙니까?" 사령관(아직 익숙지 않으니 그냥 이렇게 부르기로 한다.)은 대답했으나 그도 전투의 생리에 대해서는 평생을 연구해 본 감각이 있는 까닭에 자기의 대답에는 뭔가 개운찮은 구석이 있음을 느꼈다. 예상대로 희영의 힐난이 뒤따랐다. "적이 뭐 우리 마음대로 행동하는 우리 하수인들이란 말이오? 우리 편리하게 우리 사고방식대로 만든 각본에 그들이 따라하는 것은 아니란 말이에요. 스페인 군대가 아메리카를 침략할 때 돌칼과 돌창으로 쳐들어 왔었나요? 그들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마음속으로 침투할 수도 있고 전혀 엉뚱하게 지구 안에 숨어 들어가 어느 날 땅을 가르며 나올 수도 있고... 우리를 공략하려는 자들이 우리보다 고도의 문명을 가진 자들이라면 분명 우리의 사고방식으로는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우리를 침략할 것입니다. 안일한 생각을 좀 버리세요!" 사령관은 듣고 보니 타당하기에 잠깐 고개를 숙이다가 다시 들고 희영에게 반문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우리가 외계인의 침입방식을 미리 알 수 있는 능력도 없고..." "사실 나도 별 뾰족한 대책은 없어요. 단지 외계인이나 우리나 살아 움직이는 생명임에는 공통된 것이므로 나의 이 아름다움과 건강함으로 생명력의 우월함을 보인다면 그들의 기세가 꺾여질 것으로 기대하는 수밖에... " 희영은 뒷짐을 지고 굽이 뭉툭한 구두로 뚜벅뚜벅 바닥을 거닐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에 확실한 것은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이 많은 재래식 및 첨단 무기들이 지구 방위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에요. 오히려 이러한 데에 들이는 노력으로 우리의 삶 그 자체의 강화에 주력하는 것이 보다 더 굳건한 지구 방위의 길이 될 수 있을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 어쩌란 말씀입니까? 무기를 모두 해체하란 말씀입니까?" 사령관은 어조는 조금 톤이 높아졌다. 막다른 골목의 쥐 마냥 자신의 지위 자체에 대한 위협이 오는 데에는 흥분이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차피 재래식 무기를 다루고 관리하는 군대는 구성할 인원이 곧 모자라게 되므로 일단 해체 개편될 운명이다. 그러나 첨단자동화 무기의 군대는 무기의 운용관리를 위해 적은 수의 인원이라도 존속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었다. 희영은 고개를 위로 하고 껄껄껄 웃으며 다시 말투를 바꿨다. "걱정 마시게. 내 그대를 위해 내 가진 것을 아낌없이 줄 터이니 그대는 앞으로는 나와의 즐김을 인생의 주목적으로 삼고 권력의 미련은 버리도록 하게나."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접견을 위해 걸쳤던 예복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는 사령관에게 다가가서 그를 끌어안았다. "각하, 아니 폐하 그러시려 한다면 가상성험기의 작동을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사령관의 이 말에 희영은 살짝 화를 내며 그의 가슴을 밀치고 물러서고는 말했다. "아니 내가 당신의 마누란가? 그깟 것이나 같이 하고 앉았게? 저번에 약속하지 않았나? 내가, 아니 짐이 그대를 위해 그대의 씨를 받겠노라고." "그건 정자은행에... 아니 죄송합니다." "해 봐! 좀 동물같은 느낌이 들지도 모르지만 옛날식 성교가 맛붙이면 재밌어." 이렇게 말하고 희영은 그 자리에서 속옷까지 모두 벗고는 다시 사령관을 끌어안아, 밀치듯 소파 위에 뉘었다. 그도 희영이 강권하니 본래 체면을 상하는 느낌이 들게 마련인 육체실교접행위를 그대로 묵인하며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사령관은 말했다. "각하 저는 아무래도 좋으나 군대는 나라의 통치를 위해 아직 필요하지 않습니까?" 모처럼 기분에 취해 있던 희영은 눈을 살며시 감고 입을 헤벌린 채로 잠결의 혼잣말처럼 말했다. "음. 그 그건. 지난 시절에는 아무래도 필요했겠지. 국민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고 권력에 대한 충성을 받아내기 위해 쳐들어오지도 않는 적을 자꾸 쳐들어온다고 하면서 겁을 주곤 했지. 이제 나의 모성통치시대에는 그런 야비한 술수는 필요 없는 거야." "제 밑의 사람들의 반발이 염려되는데요." "그건... 이렇게 해. 경계병 두어 명과 사단장 하나쯤만 매수하면 되는 거야." 희영은 누가 듣지도 않는데 입술을 사령관의 귀에다 가까이 대고 침을 튀기며 한동안 속삭였다. 그녀의 움직이는 입술이 그대로 사령관의 귀와 매끈축축한 마찰을 일으켰다. "과연 각하는 英明하십니다. 곧 실행하겠습니다." "응. 그런데 각하? 그래, 당신은 나 아무렇게나 불러도 좋아. 그냥 희영씨라고 불러도 좋고. 그럼 수고해..." 희영은 웃저고리를 걸치고 따라 나가 집무실 문 밖까지 그를 전송했다. 다음날 새벽이었다. 전 지구에는 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 "외계인의 침략이 시작되었다. 전 지구 국민은 대피하고 지구방위대는 전투 준비에 돌입하라." 전 지구인들은 당연히 경악했다. "이게 웬 일이냐? 황당무계한 공상과학소설에서나 나오는 일이 현실로 나타나다니." "그들의 戰力은 대체 어느 정도일까?" "지구에 여자 지도자가 들어섰다고 얕보고 그러는 것은 아닐까?" "계속 황당한 일들이 일어나더니 이제 지구의 종말이 오는 건 아닐까?" 모두들 대피처로 피하면서 수군댔지만 당장에 필요한 것은 닥친 일에 대처하는 것이었다. 전 세계인들은 모두 방공호 안에서 전황을 예의주시했다. 침략외계인은 태양계 외부로부터 침입해 온다 하며 지구연방 수도 동북경 시각으로 서기 3216년 8월 15일 저녁 8시반에 태평양 한가운데의 날짜 변경선과 적도가 만나는 곳에 항공모함 규모의 우주전함 사십여 척이 지구를 향해 수직낙하로 침투한다는 것이다. 적의 침투예상지역에로의 출동명령이 내려졌다. "지구방위군 대공포화발사부대는 태평양 중앙으로 집결하라." 지구방위군이 보유한 초대형 항공모함 스무 척이 핵폭탄 등 현존하는 최강의 무기들을 모두 싣고 태평양 중앙으로 속속들이 모였다. 출동한 방위군은 극도의 긴장 속에서 한밤중의 외계인 침략을 기다렸다. 밤 11시 50분쯤이었을까. 그들에게는 사격명령이 떨어졌다. "쏴라." "남김없이 쏴라." 방위군은 사령부가 지시한 방향으로 무조건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를 쏘아댔다. 태평양의 상공에는 때아닌 인류역사상 초유의 대규모 불꽃놀이가 벌어졌다. 그러나 외계인 전함은 보이지 않았다. 출동 방위군 대장은 사령부에 문의했다. "침입하는 전함이 하나도 발견되지 않는데 계속 쏘아댈 필요가 있습니까?" 이에 대해 사령부에서는 다시 "그들이 대기권에 진입하기 전에 핵무기로써 궤멸시키자는 전략이다." 라고 하며 계속 발사를 독려했다. "핵폭탄이 몇 발 안 남았는데요?" "아직 외계인 전함은 격퇴되지 않았다. 지구를 구하는 것이 중하다. 있는 대로 더 쏴야 한다." 마침내 마지막 남은 한 발의 핵폭탄도 사령부의 명령에 의해 우주공간으로 쏘아 올려졌다. "이제 핵폭탄은 다 떨어졌습니다. 그들이 나타나면 근접전이 불가피할 것 같습니다." 보고를 받은 사령부에서는 다시 지시를 내리기를 "그들의 남은 전력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우리에겐 큰 위협이 될 것이다. 나머지 재래식 폭탄들을 모두 그들이 상륙하는 시점에서 폭발시킬 터이니 전함을 남기고 모두 퇴각하라." 스무 척의 항공모함이 동원되고 전 지구의 모든 핵무기가 실려있는 대규모의 군단이지만 승무원은 한 배당 일이십 명 정도밖에 안 되는 자동화 부대였다. 그들은 영문을 모르고 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수송기 한대에 타고 사령부로 돌아오기 위해 출발했다. 당대의 항공모함들은 모두 잠수함을 겸하고 있었으며 대강의 운항 동작은 원격조종이 가능했다. 사령부에서는 총사령관의 지시에 따라 모든 항공모함을 잠수시켰다. 잠수깊이는 최대한으로 했다. 그러더니 잠수함(항공모함)과 사령부의 교신은 갑자기 두절되고 말았다. 한 편 지상 다른 쪽에서는 또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외계인들이 우리의 무기설계도를 훔치려고 한다. 모두 모아 사령부에 숨겨두어라." 모든 설계도와 작동 소프트웨어들은 사령부에 집결되었다. 민간 방위산업체에 있는 모든 자료도 징발되어 사령부에 모여졌다. 철저한 전산화 관리 체계 하에서 누락은 있을 수 없었다. 이 곳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사령관은 명령했다. "이들의 사본은 현재 지하 비밀창고에 보관되어 있다. 지금 이곳의 모든 자료를 파기시켜라." 병사들은 명령대로 곧 모든 자료를 파기했다. 그러나 지하의 다른 자료보관소는 있지 않았다. 모든 무기가 다 소진되고 모든 무기제작 자료가 사라졌으며 우주인의 침입도 거짓말이라는 것을 이윽고 모든 국민이 알게 되었다. 그러나 국민들 대다수는 아니나 다를까, 속았다는 생각보다는 이제까지 지구의 장래를 위협하던 공포의 무기들이 모두 사라지고 다시 만들 수도 없게 되었다는 사실에 기쁨과 만족감을 표시했다. 이제까지 지구연방은 말이 통일국가지 실제로는 사단장들 사이끼리의 세력다툼에 의한 局地戰이 끊이지 않아 언제 가공할 핵무기의 사용이 있을지도 모르는 공포에 모두들 떨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최소한의 치안과 경호를 위한 원시적 무기, 아니 도구만이 남고 대량살육의 흉기는 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국민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이제 됐다. 희영여왕의 영도 아래 개막되는 새 시대의 새로 태어나는 신인류들은 과거의 악습을 계승치 않는 평화의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남성지배를 합리화시켰던 각 종교의 경전들을 불살라라." 전생인류 중기 시대만 되어도 이와 같은 포고령은 아무리 절대권력자의 지위에 있다 하더라도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출산 자동화 시스템의 영향으로 이미 일반인들의 인식이 인간과 생명을 오로지 생태기능의 관점으로만 보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종교란 거의 취미생활에 가까운 것이었다. 따라서 이 일의 추진에 큰 문제는 없었다. 물론 어느 정도의 저항은 없을 수 없었다. 각 종교의 지도자들과 열성신도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사람이 어찌 빵만으로 산다고 이런 조치를 내리는 것인가?" "윤리와 도덕의 지침이 되어야 할 근본이 필요한 것인데..." 그러나 이에 대해 희영대시녀황은 이르기를 "아니다. 태초의 각 종교의 경전에는 모두 남신과 여신이 공존하며 세계를 조화롭게 다스리는 이야기들로 차 있었다. 그런데 그 중 아집과 독선에 찬 한 남신이 모든 다른 신들과 여신들을 가짜 신으로 매도하면서 억누르고 배척했다. 이 때문에 마음을 의지할 여신을 잃은 남자들은 그에 따른 정서의 불안으로 인해 더욱 더 흉포 단순화되어 가며 이웃을 침략했다. 이렇게 그 남신만이 진짜 신이라고 받드는 자들의 세력이 더해지면서 세상은 자연히 남성중심의 사회로 굳어졌던 것이다. 또한 그 이후 남성의 입장에서 남성위주로 씌어진 경전들이 모든 윤리강령의 중심부에 버티고 서 있었기 때문에 진정한 여성사회는 올 수 없었던 것이다." 하니 모든 종교인들도 여성해방이라는 대명제 앞에 시녀황의 조치를 받아들이고, 새 시대를 맞아 자신들의 새로이 행할 바를 강구했다. 이렇듯 前代未聞의 탁월한 慧智에 의해, 후천사회를 이룰 인류사회 革罷의 과업을 눈 거침없이 해낸 시녀황은 드디어 후천개벽의 핵심을 이루게 될 인간변혁의 강령을 발표했다. "이제까지 여성의 출산의무로부터의 해방이라는 허울아래 계속되어온, 기계에 의한 출산은 인간성상실의 결과를 초래할 뿐이었다. 이제부터 출산은 직접 나의 몸으로 하겠다. 그러고 출산의 역할은 내 혼자서 맡을 것이니 다른 여성들은 그대로 자신의 일을 통한 자기의 자아실현에 힘쓰라. 나의 이후에도 아이의 출산은 그 일을 맡기로 정해진 여자만이 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도 여자들은 아이의 생산자로 지목된 여자를 제외하고는 자궁을 지니고 다닐 필요가 없다. 그리고 남자는 종자수정을 위한 만큼의 최소한의 숫자만 태어나도록 할 것이다." 이 교시야말로 새 시대를 여는 후천인간의 양식을 정하는 실로 중차대한 것으로서 후천개벽의 본론인 것이다. 시녀황의 이 혁명적인 次時代 인류진화방향의 지침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우려도 뒤따랐다. 그녀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많은 자들은 그녀에게 이 조치의 필연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하나하나 물었고 시녀황은 이들에게 그 참의미를 낱낱이 이르며 훈도(薰陶)했다. "아니 그렇다면 앞으로 수십 년간 몇 명이나 이 지구상에 새로 태어날 수 있단 말입니까? 무리입니다. 수정란은 폐하의 것으로 할지라도 출산시스템은 따로 갖추어야 할 것이옵니다." 이에 시녀황은 가로되 "물론 처음에는 사람의 수가 절대 부족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의 자연출산으로도 차세대를 이어갈 수 있을 만큼 작금의 생명과학기술을 총동원하여 나의 출산능력을 극대화시키도록 할 것이고, 앞으로 나의 후손 중 출산을 떠맡은 자들은 더욱더 강한 출산력을 가지도록 진화하게 될 것이므로 인류의 미래는 얼마든지 번창할 수 있을 것이다." 라 하니, 이는 곧 그녀는 다가올 후천의 시대를 미리 내다보는 혜안을 지녔음에라. "어차피 모두 여황폐하의 자손이온데 그렇게 출산족(出産族)과 비출산족(非出産族)으로 구별지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예 모두에게 출산의무를 지워야 차세대 인류의 충분한 증가가 이루어지는 것 아닙니까?" 이에 대해 시녀황은 다시 가벼이 나무라며 이르기를 "그대들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도다. 짐의 후손이라 할지라도 모두들 차세대 인류사회의 일원으로서 저마다의 역할을 할 자들인데 그들은 작금의 일반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가뿐한 몸으로 저마다의 일을 가져야 함은 물론이고 이제부터는 그에 더해 자신들의 남편과 자식에 대한 온갖 사회적 부담도 덜게 된다는 것은 어찌 뜻 있는 일이라 하지 않겠는가? 지금까지 천수백년간 모든 인류의 여성은 자아실현을 위한 일의 열중과 후손양육을 위한 모성 유지의 이중부담의 딜레마에 빠져 있었지 않았느냐? 이제 그 해답이 주어진 것이니 모성실현의 부담은 앞으로도 후계(後繼)의 의무를 진 여자만이 도맡아 하게 되느니라. 다른 모든 여성은 이제 일체의 등걸림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니라." 했으니 이는 곧 누천 년(累千年)의 여성핍박사의 종지부를 점(點)함이라. "어차피 세상일은 남자와 여자가 같이 어우러져 해나가게 되는데 굳이 남자를 그렇게 줄여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들 중에서 일부만을 종인(種人)으로 삼으면 되지 않사옵니까?" 시녀황은 껄껄껄 웃고 나서는 "어차피 양성(兩性)의 교제에 의한 생식으로 이어온 인류의 진화는 진정한 의미의 퇴화밖에는 될 수가 없었다. 초기 인류사회에서 인류사회를 이끌어갔던 철인(哲人)들은 하나같이 그들의 능력과 지위에 걸맞는 높은 도덕성을 가지고 인류사회를 이끌어 왔었다. 그러나 그 이후, 남자의 탐욕이 그 원인인지 아니면 탐녀도(貪女度)로 남자를 재는 여자에 원인이 있는지를 막론하고라도, 탐욕스러운 남자들은 우수한 자질의 여자들을 앞다투어 차지하곤 하여 우수한 능력과 저급한 도덕성의 비합리적인 교잡(交雜)은 되풀이되었다. 이렇게 능력면에서는 우수하면서도 저급한 도덕수준을 가지는 자들이 계속 나오게 되어 급기야는 저급한 도덕성의 자들에 의한 통치가 전 인류에게 보편화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는 인류는 갈수록 터 타락만을 거듭해 질 수밖에는 없다. 어리석은 자들이여. 남성(男性)은 이미 그 효력을 잃은지 오래건만 이제까지 우리는 과거의 관습에 매어 그저 그대로의 세상을 이어 왔을 뿐이다. 현대의 모든 방면의 생산활동에 원시적 힘은 필요하지 않음을 모르는가? 단지 섬세한 손놀림과 민감각(敏感覺)이 유용할 뿐이다. 남자의 과다함은 사회혼란과 범죄유발의 원인제공일 뿐이다. 그들의 수효를 최소화하여 보다 평온하고 안락한 사회가 이루어지도록 할지어다." 라고 준엄히 하갈하니 이것은 선천남자의 누죄(累罪)의 당연스런 귀결이었어라. 전 지구의 여성은 수천 년간 이어온 질곡과 갈등이 일거에 해결되는 후련함에 실로 감읍하지 않을 수 없더라. 이렇게 하여 모성유지와 자아실현을 각기 분담하는, 차세대여성의 새로운 양식은 정립되었다. 출산자동화시스템에 자궁을 위탁관리하는 방식 대신에 이제부터의 일반 여성들은 애초부터 자궁이 자라날 필요가 없었다. 이를 위해 시녀황의 국립생산원 근무 시절에 이미 추진되고 있었던 최적화성장유도분유(最適化成長誘導粉乳)의 개발을 촉진하고 그 효능을 극대화해 가장 효율적인 인간형의 정립을 실현하도록 했다. 최적화성장유도분유는 신생아의 자궁을 위축, 퇴화시켜 아이는 자라고 나서도 이전의 10세 여아의 체형을 유지하도록 한다. 그것은 섬세한 손놀림이 주로 요구되는 당대의 주된 노동양식을 소화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간형이기 때문이다. 몸에는 몸 그 자체 이외의 불필요한 부속물(附屬物)이 없다. 모든 이차성징은 거추장스러운 것이다. 이후 후계의 역할분담을 맡도록 택해진 아이를 제외하고는, 태어나는 여아들은 곧바로 집단양육소로 옮겨져 그들로 하여금 가장 효율적인 성장방향을 유도하는 이 최적화성장유도분유에 의해 양육되어진다. 그리하여 이 여아들은 희영대시녀황의 모든 면에 걸치는 뛰어난 일 처리 능력만을 그대로 승계하고 성욕, 출산의 등의 비효율적 요소가 제거된, 오직 일을 위해서만 태어난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다. 물론 초기에는 큰 외형적 변화는 없었다. 그러나 대를 거듭해 후세로 갈수록 후천인간 일사람의 특질이 정립되어, 후천시대의 실질적 주역인 일사람의 탄생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생식활동을 위한 적은 수의 남자들도 낳았다. 이들은 생산을 위한 일체의 노동을 하지 않으며 오로지 자손번식을 위한 종인으로서 집단 보호소 내에서만 살게 한다. 이것이 숫사람이다. 그러면 희영대시녀황의 모성을 계승할 적녀(適女)는 과연 어떠한 여자인가? 그 출발은 그렇게 특별하지 않다. 오히려 특별한 모든 이들 가운데 특별하지 않은 하나라 보아야 옳을 것이다. 태어난 아이들 중 그녀가 택한 여아는 그녀로부터 직접 젖을 먹고 자라난다. 일사람이 여성으로서의 성숙이 중단되고 그대로 성체(成體)가 되는 것과는 달리 이 여자만은 20세가 되면 이전의 고전적 여성인간과 같은 풍만한 육체를 지닌 완전한 여성이 되어 희영대시녀황 그녀 자신과 마찬가지로 자손생산능력을 갖추게 된다. 혜원 13년, 지구연방 아니 시화녀황국의 수도 동북경의 고궁에 마련된 희영대시녀황의 거처에는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열두 명의 출산담당 의료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배가 자기 몸 크기만큼이나 불러진 시녀황은 진통을 거듭하고 있었다. 드디어 첫 후천개벽의 인간 자손들이 태어나게 되었다. 두 명의 남자아이와 그리고 다섯 명의 여자아이가 차례차례로 태어났다. 태어난 아이들은 나란히 희영과 그의 출산보좌관들의 앞에 놓여져 각자의 앞으로의 양육형식을 결정받게 되었다. 희영은 두 남자아이를 가리키며 "이 애들은 먼저 데려가라. 이네들은 이제까지의 남자들의 진화방향을 그대로 따르도록 전통적 일반분유를 먹여 키우도록 해라. 이 애들의 거주지는 궁궐 후원(後園)으로 한정한다." 라고 하였으니 이들 최초의 숫사람들은 이제까지의 남자들의 진화방향을 그대로 따라 이어서, 더욱 서로간의 경쟁우위추구와 강한 탐녀성(貪女ㅅ性)의 단순찰나적 행동양식이 강화되도록 자라나고, 그 이후로도 대를 거듭할수록 같은 방향을 좇게 되었다. 그리고 남은 다섯 딸을 바라보던 희영대시녀황은 이들 중 제3녀가 몸이 가장 건실하여 그녀를 후계자 희영여황2세로 간택(揀擇)하였다. 희영을 간택된 여아를 안고 말하기를 "이 아이는 직접 나의 모유를 먹여 기를 것이니라." 하니 이로부터 신생아들로부터의 적손녀 간택의 일은 법례화가 되었다. 그러나 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우선 생산적인 일을 하는 일사람부터 충분히 있어야 하므로 매 출산 시마다 간택의 행사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머지 여아들은 일사람의 양육형식으로 길러졌다. 그들은 곧 궐 밖 신생아 보육소에서 특별인간양성용 최적화성장유도분유를 먹여 키우도록 보내졌다. 비록 일곱 명의 아이밖에는 낳지 못했으나 아직 범인족에 다름없는 육신을 지닌 희영대시녀황으로서는 참으로 어려운 난산이었다. 그렇지만 이들의 출산은 후천의 새 역사를 여는 실로 의미 깊은 대 사건이었다. 시녀황의 초녀성(超女ㅅ性)은 범사를 차치(次置)하고 마침내 생육(生育)의 일에 이르러 더욱 두드러지니 그 해 일곱 아이를 낳고도 옥체의 만강함에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더라. 희영여황 2세를 몸소 당신의 성유(聖乳)로 키우실제 옛적의 예사로운 수유의 양태와는 사뭇 달랐으니 일곱 아이를 족히 키우기에도 부족함 없는 산유력(産乳力)을 오직 한 아이에게로 부여함에 따른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여라. 시기가 과(過)히 지났음에도 시녀황은 고양분(高養分)의 농액(濃液)을 막힘 없이 내이시니, 아이가 커서 응당 이유하여 일반식을 먹여야 하거늘 차라리 생유(生乳)가 성장에 더욱 주효할 뿐더러 모유의 항균성은 아이의 건양(健養)에 추호의 해악요소를 불허입(不許入)하니, 8세 때에 이르러 이유할 당시 아이는 그 몸체의 실함과 피부의 질감은 세살 아이마냥 토실하면서 근력과 골격의 강건함은 이미 십대소녀의 그것이어라. 이로부터 여황의 젖가슴에서 나오는 모유는 황유(皇乳)라 불리워지게 되니 이는 모체의 지닌 바 초녀성이 신비영약효(神秘靈藥效)의 모유로서 승계되는 연유라. 이 후 대를 거듭하여 수유의 기간은 길어지고 자라는 아이는 일면유소(一面幼少)하고 일면장성(一面長成)한 여황의 자손으로 이어지더라. 이로써 인간의 여성요소의 집약체로서의 이들을 이름하여 신격화된 창조주이며 만인의 어머니라 하여 고대의 천황씨(天皇氏), 지황씨(地皇氏), 인황씨(人皇氏)에 이은 여황씨(女皇氏), 즉 여황족(女皇族)이라 부르고 이에 반해 일사람과 숫사람은 여황족과 구분하여 통칭 범인족(凡人族)이라 하니라. 여황족의 후예로서 택해진 여아는 성숙하면 본국의 후계자로 책정하든가 일단(一團)의 범인족 백성들과 함께 따로 나가 또다른 여황의 나라 즉 여황국(女皇國)을 세우도록 하니 이는 국가와 가정의 일체화합형태로서, 후천 인간사회의 구성단위라. 지구상의 뭇 신의 허상(虛像)들도 물러갔다. 이제 앞으로는 인간의 몸으로 신의 덕을 행하게 될 지구상의 반신반인(半神半人)인 여황만이 있을 뿐이다. 시녀황의 출산은 이 후로도 약 두 해 간격으로 계속되었으며 점차로 한 배의 출산수는 늘어나 혜원 24년에 그녀가 마지막 출산을 했을 때에는 열두 명의 아이를 한 번에 낳았다. 그러나 이 때 출산능력을 갖추게 된 그녀의 딸 희영여황2세는 약 스무 명의 아이를 한번에 낳기 시작했다고 하니 출산능력 증대 지향의 진화는 이미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것이었다. 희영대시녀황후천개벽사에서는 이후의 그녀의 예사(例事)로운 행적들에 대해서도 계속 편년체(編年體)로 기술되어 있다. 다만 혜원 55년에서 혜원 63년 사이의 일은 누락이 되어 있는데 아마도 만년의 그녀가 모든 실권(實權)을 후계자에게 넘기고 일선에서 후퇴하여 고고(孤高)한 여생을 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혜원 63년, 아래로 3대에 걸친 여황족의 후예들을 보아, 대를 거듭할수록 더욱 생명력 넘치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더욱 풍부한 자손출산력을 가지며 영광스러운 후천의 신질서를 이룩해 나가는 이네들 적손녀(適孫女)들의 모습에 흡족해 하는 희영대시녀황은 이제 구십삼 세를 일기로 그 파란 많은 생애를 마치니, 시녀황의 법통을 이어받은 시화녀황국을 비롯한 십여 개 여황국들은 모두 엄숙히 그녀의 떠나감을 받아들이며 본격적인 후천인간의 여황국시대의 개막을 맞이하니라. (7) 女皇族의 융성 희영대시녀황후천개벽사의 내용은 이와 같았다. 바깥의 날씨는 쌀쌀한 바람이 불면서 이제는 가을비가 쉬임없이 내리기 시작했다. 화자이자나미는 난방기를 작동시켜 방안의 온기를 더해 놓았다. 그리고는 다음의 서책인 열여황기를 손에 들고 책상 앞을 떠나 따뜻한 바닥에서 탱탱한 그녀의 하체를 이불 속에 넣고는 두근거리는 기대로 펼쳐보았다. 이 때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있었다. "황세녀 전하의 오락학습시간이옵니다." 세 명의 궁인이 그녀의 일과에 짜여진 오락학습시간을 맞아 그녀를 가상현실전자오락견학장으로 인도하려는 것이었다. 화자이자나미는 몸은 이미 성숙한 여인의 모습을 갖춘 지 오래지만, 여황족으로서는 한창의 성장기에 있으면서 천진한 어린이의 마음을 지닌 채 수십 년째 유년의 학습을 해오며 살아오고 있다. 본래 이 시간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오늘은 중생대 공룡사회를 견학해 보실 시간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진화의 방향이 어떠한 것이었는가에 대해 알아보고 그것이 무엇이 잘못되어 그들이 멸망할 수밖에 없었는가 생각해 볼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화자이자나미는 문밖을 향해 말하기를 "나 자신을 알지 못하고서 어찌 남을 알려 하겠는가. 오늘은 나 자신을 알기 위한 학습에 전념하겠으니 그냥 물러가 있으시오." 하고 마는 것이었다. 그녀를 모시려온 궁인들은 어찌하여 오늘은 그녀가 그렇게도 좋아하는 오락학습시간을 물리치고 마는가 조금 의외로 여기면서 또한 자신을 알기 위한다는 학습이 무엇을 말하는지 의아해 하며 물러 나왔다. 그러나 그녀가 평소에도 그렇게 규칙적으로 일과시간을 지켜가며 지내지는 않았던 것을 알기에 그렇게 대수롭게 여기지는 않았다. 사실 오늘 할 예정인 오락학습은 이미 십 년 전쯤에 했던 것으로서 화자이자나미는 벌써 다섯번째 차례이며 또한 담당 궁인들도 고참담당자들에게는 세번째가 된다. 그녀의 마음은 계속 동심을 가지고 있기에 유년의 교과과정이 마치어 졌더라도, 성년의 학습을 시키는 것보다는 유년의 과정을 보다 충실히 하도록 해 만백성의 어머니될 기초 덕성을 든든히 하자는 것이 모황 귀순마야희고의 방침이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지금 그녀가 받은 서책이 처음으로의 성년의 학습과정이 되는지도 모른다. 열여황기 상하권과 여황족생리록에는 희영대시녀황이후 그녀의 후계자인 여황족의 발전내력과 함께, 어떠한 과정을 통해 이 곳 아사녀황국의 건국에까지 이르렀느냐가 서사되어 있고, 또한 어찌하여 그녀들이 그녀들 자신마저도 간혹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볼라치면 깜짝깜짝 놀랄 정도의 지극한 아름다움을 가지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도 씌어 있는 것이다. 화자이자나미는 계속해서 이 모든 귀중한 기록의 책자를 하나하나 보아 나아갔다. 오후에 들어 그녀는 식사담당 궁인이 시간을 맞추어 배달해 온 이유간식(離乳間食)을 들다가 밀려오는 졸음으로 인해 낮잠을 청했다. 비록 몸은 풍만한 여인의 모습에 전생인간에 비하면 거인이라 할 크기였지만, 잠든 모습은 아기천사를 연상시키듯 천진하고 평화로웠다. 후천시대의 초기는 인간이 매우 귀한 시기였다. 당시에는 이미 전반적인 과학문화의 발전은 포화되었고 모든 생활의 여건은 평준에 가까웠으므로 지역간의 격차는 있을 수가 없었다. 계속되는 새 여황국의 건설에 따라, 많은 나라들은 기존과 신생의 다른 나라들에 대해 자기 나라를 잘 유지할 수 있는 힘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중에서 그 나라의 인구의 증가는 곧 그 나라의 국력이었다. 국력을 키우기 위해서 여황족은 계속 출산력의 증대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단기간에 많은 아이의 출산이 절실히 요구되니 더욱 큰 자궁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여황족의 몸도 충분히 커질 필요가 있어 여황족의 몸은 대를 이어가면서 커져갔다. 그러나 한 배에서의 많은 출산을 위해 몸이 커져나가자 한 때 여황족 진화의 방향이 혼동이 있기도 했다. 몸이 커져 가는 진화는 대략 키가 일반 일사람이나 숫사람의 4배가 되는 정도까지 진행되었다. 그런데 몸길이가 4배가 되니 몸의 전체부피는 4의 세제곱인 64배가 된다. 그 몸을 지탱하려면 다리의 단면적이 역시 범인족의 64배가 되어야 하므로 다리 굵기는 범인족의 8배의 지름을 가져야 할 것이다. 또한 몸길이가 4배가 되었을 때 몸의 표면적은 16배가 되나 몸 전체의 부피가 64배인 만큼 몸의 신진대사량은 64배가 된다. 인간이란 항상 피부에서 땀배출을 통한 대사를 하므로 이대로는 땀배출을 위한 표면적이 매우 부족하게 된다. 시녀황으로부터 약 이십대 손 정도까지의 초기여황족 시대에, 대륙 각지에 여황국이 상당히 널리 퍼져 번성하기 시작함과 더불어 그들 사이에서의 세력 경쟁도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보다 효과적으로 여황국을 통치하기에 적합한 형태로의 진화가 이들에게 절실히 요구됨은 물론이었다. 이에 따라 간혹 일부 여황족의 갈래 중에는 그들 자신의 원활한 활동을 위해 큰 몸의 생리에 맞게 몸의 형태도 같이 변화하는 경우가 있었다. 즉 그들이 큰 몸을 지니면서도 불편없이 걸어다니며 움직일 수 있게 하기 위해 마치 코끼리와 같이 굵고 억센 팔다리를 가지기도 하고, 또한 많은 신진대사량에 따른 다량의 땀배출을 자연스레이 감당할 정도의 충분한 피부 표면적을 위해, 역시 마치 코끼리와 같이 주름잡힌 피부를 가지도록 진화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여황이 지배하는 나라는 숫사람들의 진심 어린 충정(充精)을 얻을 수가 없었다. 숫사람들은 마지못해 흉내만 낼 뿐 진정한 생식행위를 하지 않고 오히려 기회를 봐서 하나 둘 다른 나라로 도망치는 것이었다. 여황국 내전의 숫사람의 수효가 줄어드는 바람에 그 나라는 이내 명맥을 유지하지 못하고 멸망하고 마는 것이었다. 더욱이 큰 몸을 가진 여황의 활동이 자유로우면 그만큼 다스리는 신하와 백성들을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폭압적으로 다루게 되는 경우가 많아, 결국 신하와 백성들의 진심 어린 충성을 얻을 수 없게되어 더욱더 올바른 나라의 체제를 유지해 나갈 수가 없었다. 여황은 오로지 아름다움과 출산력만으로 숫사람과 일사람의 진정한 충성을 받으며 많은 사람을 낳는 것만이 곧 그 나라의 번영을 위하는 유일한 길이 되는 것이다. 즉 그 나라의 여황은 얼마나 아름답고 그로 인해 얼마나 숫사람의 생식력을 증대시키고 얼마나 많은 출산을 할 수 있는가에 따라서 그 나라의 번영이 좌우되었다. 이로 인해 여황족의 진화방향은 모든 생리적 편의성을 且置勿論하고 오직 옛 태고 적으로부터의 여성미덕을 한결같이 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름답기만 했지 자기의 몸에 걸맞는 신체 구조를 갖지 못하는 여황족은 이에 따라 파생되는 여러 생리적 불편을 감수해야만 했다. 아름답게만 길게 뻗은 그들의 팔과 다리는 그들의 무거운 몸을 지탱하기에 역부족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거의 활동의 자유를 갖지 못하며 모든 일에 일사람들의 시중을 받아야만 되었다. 또한 아름다움을 위해 터질 듯이 팽팽하고 탄력 있게 몸을 덮은 그들의 피부는 몸 안에서의 많은 신진대사에 의한 땀의 배출을 제대로 해내기에는 역부족이어서, 늘 촉촉하게 땀을 흘리고 특히나 더울 때에는 땀이 비오듯이 흘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곤혹스러운 것은 이러한 피부의 신진대사를 원활히 하기 위해서는, 극단적 여성편향성격에 따라 자기 몸의 노출에 대해 몹시 부끄러움을 탈 수 밖에 없는 그들이, 사실상 옷을 거의 입지 않은 발가벗은 상태에서 생활하여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황족의 진화의 본래의 목적이 고결한 생명가치의 구현 그 자체일진대 한낱 속물적인 신체의 편의성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범인의 경지를 넘는 고결한 초월인류의 출현은 이미 오래 전부터 끊임없이 예견되어 왔었으니, 일찍이 아직 人間의 어지러움이 심각의 도에 다다르기 이전인 선천시대의 중기에 人口에 빈번히 膾炙되던 어느 고전작가의 글에도, 한 생명과학자가 그에게 헌신적인 숭고한 사랑을 바치는 여인의 피와 개의 피를 나란히 시험관에 넣고는, 개와 순결한 여인과의 거리 만한 거리를 여인의 以上으로 올라가서 있을 만한 또다른 생명을 상상하는 대목이 있었더라. 그리고는 그 생명은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높음과 깊음과 아름다움을 가진 존재일 것이니 우리가 만일 그의 앞에 나선다면 우리의 추함이 부끄러워 감히 낯을 들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으며, 또한 진화의 한량없는 계단에 그러한 높은 존재가 없으랄 법이 있을까 반문하며 언젠가 그 존재의 나타남을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지 않았던가? 아아 인간은 얼마나 목마르게 기다려왔던가. 뭇 풀(艸)중에는 靈芝가 있고, 뭇 나무 중에는 椿木이 있고, 뭇 새 중에는 鳳凰이 있으며, 뭇 짐승 중에는 麒麟이 있어, 저마다 그들 무리의 가장 고귀한 족속을 우러를 수 있듯이, 만물의 영장인 인간 중에도 뭇인간 위에 올라 있는 고귀한 인간의 족속이 응당 있어야 하거늘... 인간의 형체를 하고 있으매 속된 인간의 면면을 넘어 근원적 생명가치의 존귀함만을 추구하는 여황족이야말로, 凡鷄중의 봉황이나 牛羊중의 기린과 같이 인간의 족속 중에 자리하는 超越高潔女의 족속이 아니고 무엇이랴. 인간은 실낙원의 타락 이후에 자손으로 난 그 어느 남자도 그 잘난 정도에 있어 아담보다 못하였으며 그 어느 여자도 그 고운 정도에 있어 이브보다 못하였더라. 이토록 원죄로 말미암은 퇴행의 수렁에서 끝끝내 벗어나지 못하며, 기약 없는 참담함으로 그날 그날을 이어 왔던 인류여. 그러나 여황족의 진화는 몇 대를 넘지 않아 太初女 이브의 고움과 품격의 정도를 가뿐히 즈려밟고 올라섰나니... 이는 또한 여황족이야말로 신의 창조력을 무색케 하는, 생명가치 추구의 주체였던 연유가 아니고 무엇이랴. 人間史를 통해 이어내려 온 女性美德의 한 인간여성에게의 중첩집약인 女皇族. 인류명맥을 위한 출산의 짐을 한 몸에 떠맡았으되 출산의 능력만이 필요한 전부가 아니라. 예쁜 꽃잎과 향그러운 꽃내음 없는 암술이 제 아무리 盛大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임신을 위한 受精의 誘引原인 女性美 또한 그와 같이 필요하니 숫사람의 精을 흠뻑 빨아들이기 위해 女皇은 그녀의 女性美를 한껏 뿜어내야 하는 것이라. 이십 세에 아름답고 풍만한 成女의 모습을 갖춘 뒤에도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童心으로 가득차고 그 모습은 不老하며 더욱 왕성한 活氣로 成長을 계속한다. 그리하여 더욱 아름답고 더욱 생명력 넘친 후계를 낳으니 갈수록 아름다움 더하고 갈수록 생명 더하는 여황족의 자손이여 그리하여 마침내 잃었던 태고의 인간수명도 되찾았나니 옛날 노아의 홍수시절 노아는 구백오십 세를 살았으나 홍수 이후 神과 멀어진 인간은 생명의 源氣를 잃고 십일대 아브라함에 이르러 일백 세 내외로 감소하였던 바. 인간을 바탕으로 神에 가까워지는 超女의 족속 여황족은 이를 거슬러 올라 희영대시녀황이 구십삼 세에 그 파란의 생을 마친 후 희영여황이세는 더욱 향상된 출산력으로 팔십 세까지도 자식을 낳고는 영면할 적에 이미 일백삼십 세에 달하였으나 눈이 침침하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이후 대륙의 남부반도를 거쳐 대륙의 서부 각지로 여황국을 개척 해 나가면서, 代를 거듭할수록 여황의 壽는 늘어나, 대륙 남부 반도의 시녀황의 오대손 인디라 찬드라소마에 이르러서는 삼백삼십 세를 살았고 그녀의 딸이며 시녀황의 육대손 락시미 마하데비 이르러서는 사백칠십 세를 살았으며 대륙 남서부의 시녀황의 팔대손 시바 네브티스에 이르러서는 육백삼십 세를 향수했다. 계속되는 西進끝에 시녀황으로부터의 십일대 손에 이르러, 대륙남서지중해안 지방을 다스렸던 비올레타 암피트리테에 이르러서는 팔백칠십 세를 향수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그녀들 하나하나는 이미 한 사람이라고 볼 수 없고 그녀의 인생 또한 한 사람의 生이라 볼 수 없는 것이라. 이렇듯 그 삶과 진화의 양식에서 일찍이 지구상에 번성한 그 어느 생명에도 견줄 수 없이 사랑스럽고 어엿븐 이 족속은 우주에 홀로 우아히 생명의 미를 발현하는 이 행성을 더욱 아름답게 장식해 가도다. 아름다움과 생명력의 향상이라는 그들 진화의 향방이 정립된 여황족은 계속해서 그녀들에 의한 새로운 삶의 방식을 따르는 후천 인류를 지구상에 퍼뜨려 나아가니, 그들의 진화와 융성과 함께 그들의 삶의 단위인 여황국의 번영은 역시 대륙각지로 퍼져나갔으며 선천 5만년의 전생인류시대와 맞먹는 세월을 후천의 인간사(人間史)로서 이어 내려가게 되었다. 희영대시녀황의 후천개벽으로부터 약 삼만 년의 세월이 흐른 시대, 대륙의 서북단 반도에 위치한 시녀황의 122대 손(孫) 북국여황 헤다 발키리아 13세 치하(治下)의 북미희여황국(北美姬女皇國)에로 이야기의 무대는 옮아가, 가녀린 한 여인이라 하기에는 너무나도 존귀위엄(尊貴威嚴)하고 권위로운 지배자라기에는 너무나도 애잔가련(哀殘可憐)한 여황 귀순마야희고의 사연은 시작되는 것이다. - 제 2 부 - (8) 北國의 女皇 태양이 뜨고 나서도 좀체로 뜬 것 같지 않고 태양이 지고 나서도 좀체로 진 것 같지 않는 곳. 낮과 밤이 언제부터 언제까지인지도 모르게 진종일 음울한 薄明만이 비추이고 있는 곳. 이곳 대륙의 최서북단에 자리잡은 여황 헤다 발키리아 13세의 북미희여황국에 대여섯 시간 남짓했던 낮이 끝나고 주위에는 어둠이 조금씩 깔리기 시작한다. 밤이라고 해야 그저 약간 어두워지는 것일 뿐, 아직도 주위의 모든 물체는 멀리서도 식별할 수 있을 만큼 보였다. 헤다 발키리아가 기거하는 바할라궁의 하늘에는 어느 덧 엷은 녹색의 오로라가 구석구석엔 붉은 기운을 띠며 하늘 가득히 드리워져 넘실거린다. 저 멀리 바다 끝에 무언가 자그마한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일렁이는 물결따라 은은히 반짝거리는 바닷물빛 위에 떠 있는 한 조각 그림자는 점점 그 크기를 키워 갔다. 처음에는 그저 수직으로 일어서 있는 막대 정도로 보이던 것이 그 아랫부분이 조금씩 수면 위로 나타나면서, 오래지 않아 그것은 이곳 육지를 향해 돌아오고 있는 배 한 척임이 드러나 보였다. 이윽고 그 배는 시야에 들어왔다. 뱃머리는 높이 앞으로 솟아 있었으며 양옆의 짙은 갈색의 바탕에는 울긋불긋한 꽃무늬가 빽빽이 그려져 있었다. 갑판 위에는 길다랗게 네모진 船上樓가 올려져 있고 그 위에 높은 망루가 수직으로 솟아 있는데 양옆으로 자기네들의 표식이 되는 깃발을 주렁주렁 매달아 놓아 멀리서 보면 하나의 色布 돛배로 보였다. 배 위에는 열 대여섯 명의 선원이 보였는데 한결같이 갸름한 얼굴의 금발의 소녀들만 눈에 띄었다. 그러나 갑판 위의 갖가지 일 처리를 하면서 행동하는 품은 모두가 완숙해 보였으며 전혀 어린애 같이 보이지는 않았다. 배는 앞뒤 번갈아 상하 요동을 하면서 해변가로 다가오고 있다. 배는 전기에너지에 의한 동력선이지마는 이들의 배는 동력의 발생이 기계특유의 단조로움을 벗어나 인간의 호흡패턴과 같이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거대한 배 전체는 마치 하나의 살아 숨쉬는 생명처럼 우아하게 호흡하며 자기의 보금자리를 향해 깃들러 온다. 마침내 이 용의 머리형상의 뱃머리를 한 배는 해변에 닻을 내렸다. 그들은 이곳 북미희여황국의 13대째 내려오는 통치자인 일명 북국여황 헤다 발키리아 13세의 명을 받아 자기네들 종족의 대륙 각지에로의 확산을 위한 남방원정을 떠났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이제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쳐, 모든 장수와 병사들은 긍지에 가득 찬 마음으로 돌아온다. 그들 모두는 배에서 내려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바할라궁으로 걸어 들어왔다. 바할라궁의 성벽은 매우 얕게 있는 둥 마는 둥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들어오는 광경은 궁내에서도 훤히 볼 수 있었다. 장수 십여 명과 병사 약 오백여 명의 그들은 보무도 당당히 질서정연하게 개선하는 모습이었다. 바할라궁의 실내는 워낙 침침한 분위기에 익숙해 있는 그들이라 군데군데의 굵은 기둥마다에 달린 몇 개씩의 장식용 촛불 이외에는 별다른 조명도 켜지 않은 채로 있었다. 만약 다른 족속들이 보았다면 상당히 음침한 느낌을 주었을 그런 광경이었다. 여황 헤다 발키리아는 이제 막 남방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장수들의 알현을 받기 위해 그녀의 용상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일으켰다. 칠 미터에 달하는 그녀의 몸에서 뿜어 나오는 생명의 열기는 주위의 쌀쌀한 기운을 제압하고도 남았다. 그녀의 몸의 열기 때문에 매우 성기게 삼으로 짠 상하의는 몸의 상하 주요부 약간만을 가린 정도였고, 그 대신 그녀의 황금빛 머리칼이 몸을 거의 뒤덮으면서, 그녀의 몸의 움직임에 따라 실내의 실낱같은 조명을 반사해 찬란히 반짝이는 금싸라기의 폭포수를 쏟아내었다. 그녀는 두터운 융단으로 덮여있는 용상의 난간에 어깨를 걸쳤다. 자신을 알현하려는 자들을 맞아 크게 뜬 그녀의 두 눈이 어둠 속의 푸르른 燐光처럼 빛났다. 어찌 보면 눈부시게 희고 어찌 보면 반투명에 혈색을 받아 발그레히 보이는 그녀의 몸이 어둠 속의 거대한 발광체 마냥 주위의 사물을 압도하고 있었다. 이제 610세에 이른 그녀의 모습은 긴긴 세월의 자취가 배여 있긴 했으나 그것은 오히려 더욱 중후한 위엄을 풍기면서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더해 줄 뿐이었다. 원정 대장군 노라와 그녀의 부관 애스터 등 여러 명의 인솔장수와 병졸들이 들어와 일렬로 늘어서 그녀를 알현했다. 그들 모두 앳된 소녀의 모습이지만 한결같이 늘씬하고 장대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가뿐한 느낌을 주는 보랏빛의 갑옷으로부터 매끈하게 뻗은 팔다리가 시원스러이 보였다. 그들 모두는 한 쪽 무릎을 꿇고 두 팔을 앞으로 치켜들어 그들의 지존에 대한 예를 표했다. "오로라와 같이 빛나는 지혜와 호수같이 깊은 자비와 빙하와 같이 냉철한 이성을 지니신 대 북미희여황국 헤다 발키리아 이자베스 폐하께 남방원정대 일동 영광스러운 개선의 報를 전하옵나이다." 이어서 북국여황 헤다 발키리아의 목소리가 실내를 진동시켰다. 물론 여황족 특유의 복합음이었다. 위엄 있는 初老의 女傑의 목소리가 만족감을 뜻하는 장조의 가락을 지닌 초저음에 실려 나갔다. "우리 종족의 번성을 위해 멀고 험난한 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그대들을 환영하오. 이미 보고를 통해 그대들이 혁혁한 전과를 올린 것은 알지만 이 자리에서 다시 소상히 설명해 주시오." 원정 대장군 노라가 이에 대답한다. "폐하의 은총에 힘입어 남방 각국을 돌며 우리의 씨를 퍼뜨려, 차세대에는 우리의 종족의 모습을 닮은 자손들이 대륙 각지에 많이 나올 것입니다." 그녀의 어깨까지 닿아있는 은황색의 긴 머리칼은 일사람으로서는 꽤 긴 편이었다. 불그스레한 얼굴 가운데 오똑 솟은 콧날과, 깊이 패인 눈자위 안의 회청색 눈빛이 강인한 인상을 주었다. 그녀의 허리에 찬 장검이 빛났다. 장수의 위용을 나타내 주는 장려한 모습의 병기였지만 그것을 활용할 때는 매우 드물다. 동행했던 애스터가 이에 덧붙였다. "데리고 갔던 숫사람들을 앨마아스는 남방 지중해반도의 율리아 아프로디테에게 레우볼그는 서남반도의 카르멘 갈라티아에게 그리고 랑크는 서방 섬나라의 붉은 머리 족속의 이사벨라 버진메어리에게 보내어 그녀들로 하여금 이들의 씨를 받게 했습니다." 귀밑까지 닿아있는 샛노란 곱슬머리에 파란 눈동자의 그녀는 원정길을 가며 모든 관련되는 실무를 맡아 하는 역할을 해 왔다. "그들에게서의 어떤 저항은 없었나?" 여황의 물음에 노라는 다시 자세를 갖추고 대답하기를 "그들의 성 문전에서 약간의 충돌이 있었지만 용맹한 우리 군사들에 의해 곧 방어선이 무너졌으며 이윽고 입성해 그들과 대좌했을 때 그들은 우리의 요구를 알고는 곧 순순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필요한 백성의 증가를 위해 부족한 숫사람을 우리의 종족으로써 보충하기로 했습니다. 폐하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의 영상을 그들에게 보이니 그들도 우리 종족의 금발과 푸른 눈을 선망하여 같이 가지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그대들의 노고를 치하(致賀)하오. 지금 우리가 비록 이곳 대륙 한 구석의 소수인종에 불과하지만 이렇듯 모든 면에서의 우리의 우월성으로 인해 우리의 씨는 곧 대륙전역에 퍼질 것이오," 헤다 발키리아 13세 역시 진정 사랑할 수 있는 이에게 자신을 바치지 못하는 한을 품고 살아가는 하나의 여황족임에는 다름이 없었으나, 그녀는 자신의 한을 이러한 적극적인 개척과 정복의 정신으로 승화시켜 이로 하여금 자신의 생의 활력소가 되게 하고 있었다. 여황의 이 말에 노라는 다시 말했다. "폐하, 우리의 씨를 대륙 전역에 퍼뜨리기 위해 이미 남방에는 아뢰온 바와 같이 숱한 우리의 숫사람들을 파견시켰으나 동방에는 광활한 대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씨를 받을 만한 기존의 여황국이 있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어찌하면 좋겠소?" "황세녀 전하와 저희 범인족 상당수를 같이 보내어 우리 여황국의 핏줄을 이은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짐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바는 아니었지만..." 그녀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는 곧 모두를 향해 말했다. "경들의 의견은 내 오늘 처음 들은 것도 아니니 짐은 곧 동방 식민개척을 위한 방안을 세울 것이니라. 그대들은 당분간 숙소에서 마음껏 쉬고 다음의 보다 큰 일을 준비할지어다." 노라와 여러 장수들은 再拜하고 헤다 발키리아의 어전으로부터 물러갔다. 사실 다 자란 자신의 황세녀를 따로 分家시켜서 새 나라를 세우는 것은 여황족의 당연한 전통이지만 옛적에 시녀황의 후손들이 대륙을 西進하면서 여황국의 건립지역을 넓혀가다가, 가장 온난하고 살기 좋은 지중해 연안에 이르르고서부터는 새로운 땅으로 더 나아가 나라를 건설하는 일은 지극히 완만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기껏해야 여황이 자신의 황세녀에게 바로 옆의 땅에 분가한 나라를 세워 주거나 아니면 아예 자기 땅을 떼어 주든가 하는 정도였다. 게다가 陰濕한 북방의 땅에 새 나라를 세우는 것은 꺼려지는 일로서 대체로 모황의 비위를 거슬리어 쫓겨나게 되는 황세녀가 죄수, 부랑자 등으로 구성된 얼마 안되는 범인족만을 데리고 나오면서 이루어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밟으면서도 여황국의 북쪽 땅으로의 진출은 조금씩 계속되었지만 이제 헤다 발키리아13세의 대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북쪽으로 향할 곳이 없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는 남방의 살기 좋은 곳으로부터 밀려난, 不適應者들로서의 기원을 가진 그들이었지만 북방의 거친 환경에 적응해 살다보니 점차로 건장한 체격과 용맹성을 대를 이어오면서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또한 빛을 받지 못해 탈색된 그들의 모습이 남방인들에게 오히려 더 아름답고 신비하게 보이게 된 것도 아이러니 였다. 남방의 여황들은 헤다 발키리아의 모습을 알고는 자신도 그녀를 닮고 싶어하고 기꺼이 자신의 후계는 그러한 형질을 가지도록 헤다의 숫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힘에 의한 정복이 아닌 미모에 의한 정복이 이루어진다고나 할까. 그리고 또한 상대방을 죽여 없애는 방법이 아닌 자기네 종족들을 더욱 많이 퍼뜨려 살리는 방법으로 정복이 행해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이미 여황족으로서도 다 자란 150세의 딸 소냐 발키리아 14세가 있었다. 그러나 아직 마땅한 새 땅을 찾지 못해 모녀동거를 하고 있는데 이것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 위험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상황이다. 한 여황국에 출산능력이 있는 여황족이 둘이 있으면 국내의 범인족들을 다스리는 근본이 흔들릴 위험이 있게 되는 것이다. 소냐 발키리아 14세가 분가를 못하고 있을 동안에 이미, 아직은 출산능력이 있는 여황족의 성년은 아니지만 또 하나 여황족으로서의 성장을 간택받은 그녀의 아우가 태어나 자라고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귀순마야희고였다. 오십오 년 전인 헤다 발키리아13세 즉위 420년 초가을, 바할라궁에서는 칠일간에 걸친 수정식행사가 거행되고 있었다. 숫사람들은 모두들 평소의 무료한 생활에서 쌓인 억압된 마음을 이 기회를 통해 발산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일백여명의 숫사람들은 교대로 하루에 열댓 명씩 여황과의 수정과업을 하느라 극도로 흥분해 있었다. 대기중인 자들은 자기네들끼리 밤새도록 편지놀음을 하며 수정권의 선후배분을 다툼하고, 더러 합의가 되지 않는 경우 서로 엎치락뒤치락 치고 받는 불상사까지도 있었다. 한편 이미 수정을 끝낸 자들 또한, 할 수 있는 만큼 못했음을 한탄하면서 밤새도록 술을 마시거나 수정권 선후배분의 약속을 안 지켰다는 이유로 싸우기도 해, 그들의 거처는 실로 어지럽기 이를 데 없었다. 이 때 이들 숫사람들 중에 例外者的 別種이 하나 눈에 뜨였다. 차렌이라는 이 숫사람은 고개가 약간 꾸부정한 채로 다른 숫사람들과는 달리 평소에 혼자 사색하는 듯이 앉아 있거나 정원을 거닐거나 해서 다른 숫사람들과 궁인들의 눈에 금방 뜨이는 것이었다. 숫사람들은 그냥 혼자 있을 때면, 無念無索의 그들의 속성상 한 시도 어떤 행위를 하지 않으면 참을 수가 없으므로, 쉴새없이 손을 움직이는 전자오락기나 투전기 등에 붙어있을 것이 당연한 것인데, 그는 어찌 되어서인지 이들 숫사람 필수 생활용구를 필요로 하지 않아 모두를 의아하게 했다. 先天 絶滅類의 宇宙四時를 건너뛴 隔世遺傳이랄까. 차렌의 別行은 수정식에 이르러 더욱 두드러졌다. 그도 역시 숫사람은 틀림없는지라 수정식 그 자체를 반가이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속한 조의 차례가 되어 모두들 정신없이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해 여황의 몸을 흠씬 맛보기 위해서 다툼하고 있는 동안 그는 衣冠을 갖춘 채로 한 발치 떨어져 있어서 멀거니 쳐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숫사람들의 광란에 가까운 애무와 射精에 정신없이 자신의 알몸을 내맡기던 여황 헤다 발키리아가 그의 이상스런 태도를 보다 못해 그에게 물었다. "차렌, 그대는 어찌하여 내게 登身하지 않는고?" "..." "그대에겐 나의 이 玉香聖體가 흡족치 않더란 말인가?" 여황이 다소 노기 띤 어조와 표정으로 그에게 다시 말을 건네자 그제서야 차렌은 퍼뜩 정신이 든 듯 여황을 향해 돌아서고는 이내 무릎을 꿇고 아뢰기를 "폐하 소인인들 어찌 폐하의 옥향성체의 향취를 음미하고 싶지 않을 수 있겠사오이까? 단지 소인에게는 理性에 의한 思考의 기반 위에서 존재하는 하나의 쾌락적 유희이오나, 저들에게는 그들의 자의식을 代置해 그들의 행동을 지배하는, 그들의 생 그 자체를 이루는 전부이옵니다. 그러기에, 보다 요구가 절실한 자들에게 자리를 우선 내어줌이 합당한 줄로 알아옵기에 그들이 자기들의 욕구를 원하는 바만큼 충분히 끝마칠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중인 것이옵나이다." 했다. "우화! 호호호!" 헤다 발키리아는 갑자기 크게 벌어지는 입을 손으로 막으려 하며 한바탕 웃어제꼈다. 그녀의 배와 허벅지도 요동을 쳤다. 그 바람에 정신없이 그녀의 몸을 핥고 더듬고 있던 숫사람 서너 명이 한꺼번에 나가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소문대로 과연 그대는 별종이로고..." 결국 이날 受精日에도 차렌의 차례는 돌아오지 않은 채 날이 저물고 말았다. 이전에 그가 특별히 주목을 받지 않을 때에도, 먼저 사정을 하려고 아귀다툼을 하는 다른 숫사람들에게 밀려 번번이 수정식 때마다 한 번도 사정의 기회를 가지지 못한 것이 그였다. 떠들썩한 수정식 기간이 끝나고 이틀인가 지났을까. 그 동안의 피로에 모두들 며칠이고 계속될 잠에 떨어지고 있는 숫사람들의 거처의 한 구석에서 홀로 깨어 또다시 자신만의 사색에 빠지고 있던 차렌에게 한 궁인이 몰래 찾아들었다. 그리고는 나직이 그에게 속삭이기를... "차렌, 너를 폐하께서 특별히 부르신다. 어서 빨리 나오너라." "무슨 말씀입니까? 숫사람을 혼자 부르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잔말 말고 어서 오래도... 낸들 폐하의 속뜻을 알기나 하냐? 꾸물거리지 말고 어서." 차렌은 영문을 알지 못한 채 한밤중에 헤다 발키리아의 침실로 불러들여졌다. "어서 오너라, 차렌. 내 너를 한번 가까이 하고 싶어 불렀느니라. 돌이켜보니 내가 너에게 한번도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하지만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이것은 여황국의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옵니까?" "멍청한 자 같으니라고... 여황국의 법도는 나의 생명활동을 위해 있는 것인데 법도는 내 아래에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이렇게 하여 차렌은 여황의 특별배려를 받아 사정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의관을 갖춘 채로 멍하니 서 있으면서 여황을 응시할 뿐이었다. "뭣 하는 거냐? 어서 등신하지 않고!" "황공하옵니다. 폐하의 성체의 아름다움이 가져다주는 느낌의 참뜻에 대한 의문이 일어나서 잠시..." "쓸데없는 소리 말고 냉큼 실행하지 못하겠느냐?" 여황은 짜증 섞인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저주파 음은 둔탁하게 끊어지는 듯한 소리였다. "소인 죽을죄를 졌습니다. 즉각 따르겠습니다." 차렌은 가만히 자신의 의관을 거두어 정돈하고서는 여황에게 다가가서 차분히 그녀의 몸 이곳 저곳을 쓰다듬으며 그 향취를 음미했다. 그리고는 그 다음에, 몇백 년을 숙성하고 땅속에서 파낸 술단지에 덮여있는 밀봉덮개를 그윽한 熟香을 맡으며 조심스레 열듯이, 여황의 음문을 가만가만히 열어 젖혀 벌리고는 정성을 다해 사정을 했다. 근래에 보기 드문 고상하고 우아한 수정식은 북국의 어슴푸레한 긴 밤 내내 여황 헤다의 침소를 밝혔다. 이 이색적인 수정식이 다 끝난 뒤에 북미희국 여황은 힘들게 몸을 일으켜 정좌하고 창밖의 여명을 배경으로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차렌, 그대는 아무래도 태어나길 잘못 태어난 것 같다." 라고 말하고는 그를 그녀의 양가슴 사이로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또다시 "내, 앞으로 수정식 때에는 그대를 마음에 두고 의식을 거행하리다." 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아니옵니다. 폐하 저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사옵니다." 차렌은 재배하면서 이렇게 말하고는 여황과의 하룻밤 長城建築의 大役事를 마치고 나왔다. 이 일이 있은 뒤 얼마 안 되어 차렌은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말았다. 여황과의 대역사의 밤에 자신의 혼신의 힘을 모조리 다한 것이 원인이었으리라 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여황과의 단독동침의 사실을 알게 된 다른 숫사람들의 질투에 따른 행패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차렌이 죽은 뒤 북국여황은 곧 삼백명의 아이를 낳았다. 차렌에 대한 연민에 착잡하기도 하던 그녀는 아이들 중 맨 나중에 나온 아이의 우수 어린 눈빛으로부터 그 아이에 대해 직감적으로 느끼는 바가 있었다. 그녀는 아이를 잡아안고 말하기를 "짐은 앞으로 이 아이를 나의 젖을 먹여 키우겠노라." 했다. 이 예기치 않은 말에 산후조리의 담당관들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폐하. 이번 수정식은 전혀 황세녀 간택을 예정하지 않지 않았사옵니까?" "지금도 과년한 황세녀가 있는데 심히 염려되옵니다." "揀擇官도 소집하지 않은 자리에서 어찌 황세녀를 택하신단 말씀이옵니까?" 그러나 여황은 이를 물리치며 "황세녀의 양육에 대한 결과는 내가 책임질 것이니 그대들은 걱정 말라. 간택관들에게는 내 잘 일러둘 것이니라." 하고는 택한 아이를 자신의 양가슴 사이로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오백 년 가까이 이 나라를 용의주도하게 통치했던 헤다 발키리아의 단호한 성격을 다들 아는지라 그들은 이내 물러섰다. 이렇게 하여 마지막 낳은 아이는 여황 헤다의 품에서 자라나게 되었다. 아이는 워낙 몸가짐이 고상하고 얌전해 모황은 그녀에게 '貴順'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자라면서 그녀는 더욱 여성적인 일과를 좋아해 베짜는 일을 즐겨하므로 '摩耶'라는 별명도 붙었다. 여기에 여황족에 흔히 쓰는, 큰 여자라는 뜻의 '姬姑'가 붙어 그녀의 정식이름은 '貴順摩耶姬姑'가 되었으며 불리우기는 '키션 마야하이카스'라 했다. 모황은 귀순을 아끼고 사랑했으나 워낙 대범하고 호방하기만 한 그녀인지라 귀순의 지극히 섬세하고 다정다감한 성격과는 잘 맞지가 않았다. 이래서 어머니와 딸의 사이는 그저 作爲의 애정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 때문에 귀순은 항시 자신의 넘쳐나는 情의 갈구가 수용되지 못하는, 정의 주림 속에서 자신의 초년시절을 보내왔다. 귀순은 가끔가다 엄한 행동지침을 내리며 훈육하기만 하는 모황의 아래에서 자라왔다. 어머니를 무서워하던 귀순도 조금 철이 들면서부터는 자신을 위해주는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고는 할 수 있는 한 모황의 일과를 도우면서 지냈다. 귀순은 타고난 바른 몸가짐과 여황족으로서도 빼어난 총명함, 그리고 보는 이를 편안히 해주는 아름다움 등으로 궐 안은 물론 궐 밖으로도 소문이 나서 신분을 불문하고 그녀를 아는 모든 이의 아낌을 받는 존재로 자라나고 있었다. "황세녀 키션 마야하이카스 발키리아를 들라 이르라." 헤다 발키리아는 귀순마야희고를 불렀다. 귀순마야희고는 자신의 방에서 원정에서 돌아온 장수와 병사들에게 선물할 옷을 짜고 있다가 모황의 부름을 받았다. "폐하께서 황세녀 전하를 부르십니다." "예? 무슨 일인가요?" "잘은 모르지만 상당히 중요한 일인 것 같습니다." 귀순은 모황으로부터의 황유의 수유를 종료한지, 쉽게 말해 젖을 뗀지 삼 년쯤 되었다. 이제 특별한 일이 아니면 모황의 거처에 불려갈 일은 별로 없다. 그런데 이번에 원정대가 돌아온 뒤에 뭔가 중요한 일을 교시하러 자신을 부른다 하니 조금은 두렵게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귀순은 곧 자기의 차림새를 정돈하고 궁인을 따라 나왔다. 귀순마야희고는 곧 모황의 거처에 도착해 절을 했다. "서북반도 북미희여황국 황세녀 小女 귀순 마야희고 발키리아 자애로우신 모황 마마께 삼가 문안 여쭈옵나이다." 귀순은 이 때 나이 이미 오십오 세였지만 역시 풋풋한 어린 처녀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범인족에 비해 무척 크기는 하지만 아직 활동에 지장은 없는 이 미터 삼십센티 정도의 키에 짙은 청색의 원피스의 의상을 걸쳤으며 회색빛이 감도는 분홍빛의 입술에 뽀오얀 살결을 가졌고 손톱은 은광택이 나는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렇지만 아직은 모황 헤다 발키리아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연노랑의 긴 머리칼에 진녹색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양쪽 눈에는 고르지 않게 약간의 쌍꺼풀이 지어 있고 눈빛은 한눈에 보아도 선(善)하고 여린 심성의 소유자의 티가 났다. 그녀의 이런 면모는 그녀의 모황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어서 오너라 너의 총명함이 이제 그 쓰임이 올 때가 왔다." "모황마마, 무슨 일이옵니까." 다소곳이 무릎꿇어 앉은 귀순은 여쭈었다. "이제 우리 북미희여황국도 커질 대로 커져서 더이상 분가를 늦출 수가 없게 되었다. 헌데 분가를 시킬 너의 언니는 이미 여황족으로 다 성장해서 먼길을 가는 데에는 어려움이 많다. 아직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는 네가 언니와 함께 동쪽의 너른 땅으로 새 보금자리를 찾아 떠나거라." 올 것이 왔음을 확인한 귀순마야희고는 북받치는 슬픔을 느꼈다. 그렇지만 이러한 계획에 대해서는 이미 때때로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터이라 모황에게 별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단지 동방에 대한 이미 알려진 무엇이라도 더 알고자 자기의 어머니에게 물을 뿐이었다. "어머니 출발하기 전에 어떠한 차비를 갖추어야 하겠사옵니까? 아직도 아는 바가 많지 않사와요." "동방은 이곳 보다 겨울이 춥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너로서는 추위에 이길 옷가지라도 충분히 장만하고 떠나야 할 것이다." "동행하는 데에는 소녀가 믿고 의지할 만한 충직한 일사람들이 많이 있어야 할 것 같사옵니다." "방금 개선하고 돌아온 원정대의 대장군 노라가 동방원정의 필요성을 내게 다시 진언한 바 있으니 그가 마음이 있을 것이다." "그의 충직성은 소녀도 익히 아는 바이옵니다. 직접 만나 그의 뜻을 알아보겠사옵니다." 귀순마야희고는 재배하고 물러난 뒤 자기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방은 전반적으로 어둠침침한 바할라궁의 분위기 안에서 거의 유일하게 밝고 화사한 빛이 감도는 곳이었다. 그녀는 빨간 보가 덮인 하트모양의 탁자 위에다가 버섯모양을 본떠 만들어진 밝은 스탠드 불을 켜 놓고 책을 읽거나 때로는 길쌈을 해서 옷을 짜기도 했다. 귀순은 조그마한 오막살이집의 모양을 본뜬 전화기를 손으로 잡았다. 창문같이 그려 있는 것이 번호 누름판이고 지붕은 수화기가 얹혀 있는 것이다. 창문을 누르고 지붕을 열어 젖힌 귀순은 노라의 거처에 연락을 취했다. 노라는 원정을 마치고 자신의 거처에서 친구 몇몇과 담소하며 쉬고 있는 중이었다. 후천시대의 일사람들의 세상사에서 친구란 바로 가장 가까운 사람을 뜻한다. "노라 대장군이에요? 나 귀순이에요. 어때요? 주위가 왁자지껄한데 지금 즐겁게 잘 지내시나 보죠?" 귀순의 평상시의 말투는 듣는 이로 하여금 편안하고 즐거운 마음을 주기 위해 자기의 기분과는 관계없이 명랑하기만 하다. "어머 황세녀 전하. 제가 먼저 연락 드렸어야 하는데요. 지금도 건강하시고 잘 지내십니까?" "호호. 그렇게 어렵게 굴진 마세요. 잘 다녀오시느라 피곤했을 테니까 푹 쉬고 며칠 있다 입궐할 때 내 방에 들르세요. 좀 상의할 일이 있으니까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곧 만나 뵙기로 하지요." 통화를 마치고 귀순은 내일 우선 이 문제를 상의하러 언니 소냐 발키리아 14세의 거처로 찾아가기로 했다. 소냐는 바닷가에서 깊이 들어간 골짜기 후미진 곳에서 몇 안되는 일사람들의 시중을 받으며 외롭게 기거하고 있었다. (9) 女皇族 자매 귀순마야희고는 어스름 날이 밝아올 무렵 길을 떠났다. 언니 소냐 발키리아의 거처를 찾아가는 길은 바할라궁 옆으로 나있는, 깎아지른 斷崖의 절벽을 양옆에 둔 峽江을 따라 수로로 가는 것이 가장 편리하다. 몇몇의 궁인들을 데리고 자신의 전용인 小龍船을 타고 때마침 모처럼 난 엷은 햇빛을 받으며 그녀는 나들이를 간다. 소룡선은 이름 그대로 하얀 작은 용의 형상을 한 뱃머리가 앞으로 솟아있고 양옆에는 흰 바탕에 온통 가지가지 꽃들이 가득 그려있는 배로서 배 위에는 호젓한 정자와 같은 구조물이 올려져 있고 돛대와 같은 마스트가 높이 솟아 있다. 물론 이 배는 전기동력선이므로 마스트에 꽂힌 것은 돛대는 아니고 북미희국의 황세녀를 나타내는 꽃무늬를 수놓은 깃발이 꽂혀 있는 것이다. 날씨는 구름도 바람도 한 점 없이 화창했다. 어느 정도인가 갔을까, 양옆의 절벽이 조금 낮아진 곳에 어떻게 알았는지 수십 명의 일반 일사람 백성들이 모여 와서 그녀를 환호한다. "키션 황세녀 전하 만세!" 그들의 소리질러 부르는 '키션'은 앞의 '키'에 유달리 악센트가 붙어 있었다. 여황족의 생은 千歲가 예사이므로 여황족을 향한 '만세'는 사실상 전생인류시대의 '천세'와 마찬가지 정도의 찬사이다. 최고의 지존인 여황에 대한 찬사는 '永歲'이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어린 여황족이야말로 일반 백성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빼어난 아름다움에다 그네들과 같이 마주할 수 있는 몸을 가졌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귀순마야희고는 그 덕성과 총명함이 궐밖에도 널리 알려져 있어 그녀에 대한 범인족들의 연모의 정은 대단했다. 물론 그들 중 거의 모두가 이 촉망의 황세녀에 의한 치세를 살아보지는 못하겠지만 그러한 사정은 더욱 그녀에 대한 그들의 애틋한 사랑을 더했다. 귀순마야희고는 살짝 오른 손을 들어 그들에게 답했다. 언니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일을 상의하러 가는 지금의 심경은 매우 무겁고 진지할 수밖에 없지만 그녀는 그 마음을 내색하지 않고 환하게 미소지어 보였다. 배는 꽤 빠른 속도로 물살을 갈랐다. 화사한 흰색의 원피스가 바람에 날려 펄럭이며 그녀의 몸에 착 달라붙었다. 강건하게 균형 잡힌 육체의 윤곽이 생생하게 드러나 보였다. 햇빛을 받은 연노랑의 머리카락은 화사하게 나풀거렸다. 자신을 이리도 아끼어 마지않는 이 사람들과 머지않아 헤어져야 함은 그녀의 착잡함을 더했다. 혼자 놀던 하얀 아기고래가 가족들에게 돌아가려고 바삐 헤엄치듯이 울렁이며 나아가고 있는 이 작은 배 위에서, 귀순마야희고는 왼손으로 마스트를 잡고 안면에는 밝은 미소를 띄운 채 계속 오른 손을 높이 흔들면서, 마음속으로는 자신의 지난 시절을 되뇌어 보았다. 어린 시절 다정했던 언니의 모습이 다시금 떠오른다. 어느 시절 이후였던가 언니는 우울 증세 같은 것이 보이더니 자신과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다. 어린 그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이제 어느 정도 자신의 주변세계에 대한 눈을 뜨게 되니 그 이유를 대략 알 것만도 같았다. 귀순의 직계 언니가 되는 소냐 발키리아 14세는 귀순이 처음 태어나서 간택되었을 때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이제 늦은 감이 적지 않았던 자신의 분가가 목전에 다다르자 자신의 자리를 대신 메우려고 새 황세녀, 자신에게는 皇世妹를 간택한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어린 귀순은 언니 소냐와 함께 잘 지냈다. 언니의 몸 위를 뛰어다니기도 하고 잠잘 때는 언니의 몸 위에서 자기도 했다. 어느 날이었다. 소냐가 낮잠을 자고 일어나 보려 하는데 머리카락이 무언가에 걸려 당겨지지가 않았다. "응. 왜 이러지?" 소냐는 팔을 힘껏 짚고 일어나니 머리카락이 들려지긴 했다. 그러더니 귀순이 팔짝 뛰어 자기 품에 안겼다. "앗. 깜짝이야!" "히힛. 언니 놀랐지?" 소냐가 더욱 놀란 것은 귀순이 소냐의 긴 머리카락을 그녀가 잠든 틈을 타서 짜고 엮어 자기의 옷처럼 해 입고 있는 것이었다. "이게 뭐야? 그럼 난 어떻게 다니라고..." "난 언니하고 떨어져 있기 싫거들랑. 그래서..." "나 곧 남방원정 계획을 상의하러 어머니 만나러 가야 해. 이대로 어떡하란 말야?" "같이 가, 언니" 소냐는 귀순을 옆에 달려 걸어가게 하고는 푸른 융단이 깔린 통로를 지나 모황의 방으로 갔다. "북미희여황국 황세녀 소냐 모황마마를 뵈올 시각에 이르러 문안 여쭙나이다." "오냐 어서 오너라. 그런데..." 모황 헤다는 소냐의 옆에 있는 귀순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귀순은 냉큼 "엄마 어때요? 재밌죠? 언니와 나는 서로 떨어져 살지 않기로 했어요." 하면서 자기를 휘감은 언니의 머리털을 손으로 잡아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자랑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모황의 불호령이었다. "키션! 냉큼 풀지 못하겠느냐?. 네가 있을 자리가 아니니 장난말고 어서 네 방으로 썩 가거라!" 귀순은 훌쩍이며 얼른 자기가 반나절 애써 짜놓은 옷을 풀고 물러 나왔다. 그리고는 자기 방으로 가서 구석에 엎어졌다. "으앙. 앙." 그리고는 크게 소리내어 울었다. 이 일이 있던 때로부터 얼마 지나서부터는 그 동안 자기와 잘 놀아주던 언니도 자기를 점차 무뚝뚝하게 대하면서 오히려 귀찮아하는 듯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시 얼마 지난 후에는 언니는 별다른 이야기도 없이 다른 곳에서 살러 간다는 얘기만 남기고 궁궐을 떠나버렸다. 모황은 귀순이 임의로 소냐를 만나러 가는 것을 통제했다. 그 뒤로 귀순과 언니는 어쩌다 여황국의 공식 의전행사에서나 가끔 마주칠 수 있을 뿐이었는데 그 때마다 언니는 별다른 얘기도 않고 그냥 지나쳤다. 햇살은 화창하고 바람은 잔잔한데 小船에 몸을 싣고 언니 찾아 가는 길에 백성들은 소리 높여 이 내 한 몸 반기지만 눈밖에는 환한 미소 마음속엔 愁心이라 배는 그녀를 흠모해 마지않는 군중들을 아쉽게 뒤로 하고 계속 협강 깊이 전진해 소냐 발키리아가 불과 삼십여명의 일사람들하고만 같이 사는 수도 외곽의 조그마한 別宮에 도착했다. 별궁은 말이 궁이지 실상 강가의 낮은 언덕배기 위에 나지막한 울타리가 쳐져 있고 그 안에는 불과 다섯 채의 단층집이 지어져 있는 곳으로서 소냐가 이곳으로 이사해오기 전에는 여황의 한 측근 대신과 그녀의 친구들이 사는 살림집이었다. 그래도 황세녀의 거처라 해서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보이는 앞마당에는 가지각색의 화초를 조화롭게 꾸민 정원이 가운데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 일행이 도착하자 그곳을 지키던 보초병들은 매우 그녀를 반겼다. "키션 황세녀 전하 어서 듭시옵소서." "여러분 수고 참 많으시네요. 모두들 행복... 하셔야 할 텐데..." 보초병들에게 평소 그녀의 인사 버릇대로 '행복하세요.' 하려던 귀순은 그들의 형편을 알면서도 이렇게 인사하는 것이 한낱 空致辭에 불과하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깨닫고 말을 바꾸었다. 귀순마야희고는 여느 일사람이나 다름없이 그냥 걸어서 대문으로부터 소냐 발키리아가 있는 안채까지 갔다. 소냐 발키리아는 이 날 아침 아우가 온다는 보고를 미리 받았었다. "소냐 皇世姉 전하를 뵈오러 오늘 본궁의 키션 皇世妹가 방문한다 하옵니다. 전하가 아직 주무실 때 이미 출발했다 하옵니다." "으응? 웬일로? 걔는 우리 모황마마의 총애를 받고 이 존귀한 여황국의 후계수업을 받느라 정신없어서 이런 후미진 곳에 찾아올 만치 아쉬운 것은 없을 터인데?" "좀 중요한 일을 상의 드리러 온다 하옵니다." "그래? 그렇다면 아마도 우리 모황폐하의 지엄한 전갈이라도 받고 오는 모양인데... 아무렴, 잘 보여서 좀 은덕을 나누어 입을 궁리를 해야지." 그리고는 약간 화장도 하고, 옷매무새도 조금 고치곤 했다. 하기야 그네들 여황족에게 전생인류 여성이 하는 것과 같은 화장은 필요가 없다. 그냥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진한 화장을 한 전생인류 여성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단지 얼굴에 묻었을지 모르는 먼지를 좀 닦고 머리카락을 조금 가지런히 하는 정도이다. 또한 옷도 그네들이 입을 옷의 한계가 있으므로 만남을 위해 특별히 차려 입을 옷은 없다. 약간의 장식물에 지나지 않는 옷이지만 그래도 차림새를 신경 쓰는 여성본능은 있으므로 조금이라도 낫게 보이려고 살짝 손보는 것이다. 화장을 마치고 나서는 소냐는 자신의 자리에서 무심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귀순마야희고가 들어왔다. 키 6미터의 여황족 성년이 다 된 소냐는 침대모양의 坐床에 모로 누워 있었다. 유난히 흰 살결을 가진 그녀는 둥그스런 얼굴에 약간 곱슬한 노랑머리카락, 호수같이 푸르면서도 회색빛이 감도는 큰 눈, 그리고 어머니의 센 콧날과는 달리 적당히 무난할 정도로 선 콧날에 도톰한 입술을 가지고 있었다. 몸도 늘씬하고 장대함만을 보이는 모황과는 달리 여황족의 몸 크기를 생각지 않는다면 아담한 느낌을 줄 수도 있는 통통한 형태였다. 그녀의 의상은 역시 그녀도 몸으로부터 항상 왕성한 생명의 열이 솟아나오는 여황족인 까닭에 삼으로 성기게 짠 옷으로 약간의 장식만 달린 채 상하주요부 조금만을 가린 상태였다. "북미희여황국 소냐 황세자 전하께 小妹 귀순 삼가 문안 여쭈옵나이다." 귀순은 약간의 예를 보이고 좌정했다. "허. 내가 무슨 황세자냐? 그냥 잉여 여황족의 하나일 뿐이지." 귀순과 비슷하면서도 더 성숙된 맑은 처녀의 목소리지만 소냐의 목소리의 저주파성분은 그녀의 울적한 기분을 나타내듯, 만약에 주파수를 조금 높인다면 음산한 바람소리와 같이 느껴질 소리였다. "언니 그렇게 말씀하지 말아주세요. 우리의 가까운 곳에는 더 이상 사람이 살 만한 곳을 찾지 못했던 것 아녜요?" "못 찾긴 왜 못 찾아. 밤낮 뻔한 땅인 남쪽으로만 원정을 보내 종자보급이나 하고 마니까 그렇지. 그래 봐야 당장 우리 족속에게 득 되는 것이 뭐가 있어? 지금 사는 우리 족속들을 위한 더 좋은 땅을 찾아보고 거기 새로 나라를 세우기만 하면, 나도 보다 많은 우리의 족속들을 낳을 수 있고 그러면 오히려 우리의 족속이 더욱 널리 번성할 수 있는 것인데..." 소냐도 어릴 적에는 모황의 하고자 하는 일에 매우 열심히 봉사해 주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남방원정은 숫사람들의 분양에만 그쳤지 정작 자기가 가서 나라를 세울 땅을 찾지 못함이 드러나자 그녀의 실망은 갈수록 더해졌다. 이러던 중에 귀순이 태어나던 시기를 전후해 미처 분가의 준비를 갖추지 못한 채 그녀도 어느 덧 여황족 성년의 나이가 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한나라에 두 여황이 있을 수 있는 위험이 생기게 되었다. 모황 헤다는 서둘러 그녀를 한 명의 숫사람도 배정하지 않고 시중들 일사람 삼십 명 남짓만 대동시켜, 이곳 멀리 떨어진 별궁으로 이사하게 하여 궁정으로부터 격리했다. 게다가 데리고 나온 일사람들도 이제는 늙어서 제대로 시중을 들지도 못하는 이가 허다한데도 좀체로 바꾸어주지도 않았다. "언니. 바로 그 때문이에요. 모황마마께서 동방으로 분가시키기로 결정하셨다 해요." "분가? 누가 그걸 몰라서 이러고 있는 거니? 동방은 땅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전혀 아는 게 없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먼길을 나설 수가 없어. 너나 늦기 전에 어서 준비해라. 물론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 지 알 길은 없지만... 참 너는 상속자로 예비되어 있으니 그럴 필요도 없겠지." 소냐는 귀찮다는 듯 몸을 뒤척이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하의가 흘러내려 그녀의 눈부시게 흰 엉치뼈 언저리 부위가 노출되었다. "언니. 저와 함께 가시는 거예요." "뭐. 네가 간단 말이냐? 정말." 놀란 그녀는 다시 몸을 뒤집어 엎드린 자세를 취했다. 아랫도리의 하이얀 속살이 성긴 실가닥 사이로 희끗희끗 노출되었다. "그럼 어머니는 또 후계자 아이를 낳으신단 말이냐?" "예. 저도 상속자의 자리를 갖는가 기대한 적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아직 너무 건강하세요. 이번을 계기로 조만간 황손간택수정식을 거행하여 아이를 낳으실 거예요." "네가 가면 나 혼자보다 무엇이 낫다는 거냐?" "언니 제 자랑은 아니지만 저는 동방의 지리에 대해 많은 것을 미리 알아보았고 또 저를 따르는 많은 범인족 백성들을 인솔할 수가 있어요. 언니는 그냥 여황용 안락수레만 타고 가시면 될 뿐이어요." 소냐 발키리아는 쌓였던 응어리가 풀리는 매우 반가운 일임에는 틀림이 없었으나 너무 갑작스레 맞이한 일이라 얼떨떨한 듯 잠시 무표정하게 귀순마야희고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이윽고 "키션 황세매야, 네가 진정 나를 위해 그럴 수 있단 말이냐?" 하며 손을 내미니 귀순은 얼른 그녀의 품에 안겼다. 소냐는 기쁨과 동시에 자신도 이제 어머니를 이별한다는 야릇한 서운함이 느껴졌다. 어머니와의 이별에 대한 감정은 귀순의 경우는 물론 더했다. 자매는 기쁨, 기대, 서운함, 그리고 두려움이 교차된 서로의 기분이 뒤섞여 한동안 같이 울먹이며 서로의 몸과 얼굴을 부벼댔다. "모든 준비는 내가 다 해 놓을 테니 언니는 출발할 때 같이 가기만 하세요." "그래. 어서 가자. 이 생활은 하루하루가 너무나도 견디기 어려우니 어서 준비가 되는 대로 떠나자." "그럼 이제 한 달쯤 있다가 준비가 다 되면 내가 다시 와서 가자할 때 같이 가세요. 언니." 이 곳에 근무하는 일사람들도 소냐 발키리아가 이제 떠난다고 하니 모두들 기뻐해 마지않았다. 물론 겉으로는 이제 황세녀전하의 한이 풀렸다고 즐거워하며 또 약간의 진심도 있었겠지만 실상은 그들도 소냐의 일상 돌보기에는 지쳐 있었다. 외부에서도 이 곳으로 부임하기를 모두들 꺼리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외부의 다른 사람으로 근무교대를 시키기도 어려웠던 것이다. 그들은 기뻐하면서도 정작 그들 중에 소냐와 함께 동행을 자원하는 자는 없었다. "키션, 같이 점심이나 하자." 때맞추어 소냐의 시중을 드는 일사람들이 식사를 가져왔다. 소냐의 식사를 돕는 인원 두 명과 귀순은 같이 자리했다. "키션 황세녀전하, 입맛이 맞으실는지 모르겠어요. 젖뗀지 얼마 안되는 분을 위한 이유식의 재료가 이곳에는 준비되어 있지를 않아서. 훗, 어떠실지... " "괜찮아요. 좀 거친 음식도 먹어 버릇해야 위가 단련되죠." "우리 키션은 무엇이든 잘 먹을 것 같지 않니? 배가 탄탄하니 뭐든지 녹여 버릴 것 같잖아? 후후." "언니, 난 몰라 그게 뭐야? 힝." "좋은 말씀인데 뭘 그래요? 호호." 소냐의 시중드는 일사람들도 모처럼 즐겁고 화기애애한 자리를 가졌다. 점심 후에 귀순은 언니와의 오랜만의 긴 시간의 정담을 나누었다. 한 나절을 보낸 뒤에 귀순은 더 있다가라는 언니의 말에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 하면서 아쉬운 손을 잡으며 다음에 찾아올 약속을 재차 하고는 다시 별궁으로부터 출발했다. 돌아올 때는 배는 천천히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벌써 저물기 시작한 해는 소룡선이 타고 내려오는 협강에서는 양쪽의 높은 절벽에 가려 이미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바할라궁 가까이 올 때쯤엔 이미 주위는 어둑어둑 했고 오늘 또다시 하늘에 드리워진 오로라가 넘실넘실 춤을 추는 모습이 강물에 반사되어 보였다. 이제까지 순수함만으로 살아오기만 했던 그녀에게 앞으로 닥칠 시련을 불안하게 예고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녀의 착잡한 마음을 위로해 주려고 애쓰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는 무심히 하늘의 것과 강물의 것을 번갈아 보면서 멍하니 서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큰 두 눈 속에서도 각기 두 개의 오로라가 서로 경쟁하듯 하늘거렸다. 그녀의 눈 속의 것들은 바깥의 것들보다 불규칙한 搖動이 더 심한 것 같았다. 이 쓸쓸하고 적막한 대륙의 맨 구석배기에서 지금 그녀와 여섯 개의 오로라는 무언의 대화를 나누고 있다. (10) 東方 遠征 귀순마야희고는 예정대로 대장군 노라의 방문을 받았다.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듣자마자 귀순은 꽃넝쿨로 둘러싸인 자신의 별채의 문밖으로 나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어서 와요. 언니 반가워요." "전하. 황송하게 그러시지 마세요. 미천한 제가 어찌 전하의 언니란 말입니까? 누가 볼까 두렵습니다." "호호. 뭘요. 여기는 아무도 보는 사람 없어요. 그냥 우리 둘만 있는데요 뭘. 자 들어오세요." 귀순은 노라를 자신의 방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노라는 귀순보다 나이가 다섯 살 위였다. 신분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냥 자매간이라 얘기할 수는 없겠지만 귀순은 그녀의 곧고 충성스러움에 마음이 끌려 가까이 편히 지내려 했고 노라는 역시 귀순의 너무나도 선한 마음에 일찍부터 감명받아 그녀를 흠모해 오고 있는 사이였다. 귀순은 노라를 때때로 언니라고 부르며 명랑하고 편안한 기분으로 대했다. 방안에서 귀순은 하트모양의 자신의 탁자 옆의 침상에 무심코 걸터앉았다. 그러자 노라는 바닥에 꿇어앉았다. 귀순은 "아니 장군님 그러지 마세요. 참 여기 침대 위에 같이 걸터앉으세요." "아니되옵니다. 전하의 침상인데 어찌 제가 감히..." "아니, 그러지 말재두요." 귀순은 의자에서 일어나 노라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는 그녀를 붙잡고 같이 침상에 걸터앉았다. 노라는 조금 사양하려는 듯 하다가 잡아끄는 귀순의 힘이 워낙 강해서 그냥 따라주었다. 둘은 침상 위에서 서로 손을 잡으며 얘기를 나눴다. "동방개척을 위해 곧 植民遠征隊가 파견된다는 것을 알지요? 나와 언니 소냐 황세자 전하가 같이 가기로 했어요." "물론 알지요. 제가 폐하께 주청드리기도 한 것입니다." "다 아시겠지만 나와 같이 가기로 해요." "영광입니다. 전하를 가까이서 모시면서 보필하고 싶은 것이 저의 평소의 바램이었사옵니다." "같이 먼데 소풍가는 기분으로 놀러간다 생각하면 되지요 뭐. 그렇게 어렵고 힘들게 생각할건 없지요." 귀순마야희고는 제 마음을 감추고 마치 동방개척을 재밌게 기대되는 듯이 얘기했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라도 두려움을 갖지 말고 갔으면 하는 것이다. 중요한 용건은 이미 합의가 되어 있었으므로 그들은 길게 얘기할 것은 없었다. 그들은 곧 같이 드러누웠다. 둘의 대화는 곧 잡담과 수다로 들어갔다. 노라도 어느 덧 둘의 신분차이를 잊은 듯 즐겁게 말상대를 해 주었다. 침상 위에 같이 누운 그들은 서로 손장난도 하고 얼굴을 비비기도 하면서 저들간의 정겨운 대화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한참을 대화하고 귀순은 "오늘 여기서 자고 가요. 노라언니." "그건, 곤란한데요. 어찌 감히..." "아니요오. 오늘 한번만...힝." 이미 시간도 너무 늦었고 귀순의 잡는 힘 역시 완강하기 때문에 노라는 그냥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가정의 단위가 모호한 여황국의 사회에서 귀가의 의미가 무엇이 있겠는가. 나라 하나가 사실상 한 가정이 아니던가. 잠자리에 들기 전 귀순은 자기의 통으로 된 웃저고리를 벗었는데 그 안에는 아무런 속옷도 입고 있지 않았다. 노라는 지엄해야할 황세녀와의 동침이라 의관을 그대로 갖춰 입은 채로 잠자리에 들었다. 귀순은 밤새 노라의 손을 잡아다 자기 몸에 대 보기도 하고 몸을 뒤척이며 부벼대기도 했다. 노라는 귀순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녀를 몹시도 흠모하는 자신을 위해 하룻밤 같이 있는 시간 동안에라도 자기를 흠씬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배려라고 생각하고, 잠결에서도 새삼 사람을 너무나도 아끼며 좋아하는 귀순의 덕성에 대한 感服의 마음이 더해갔다. "음냐. 어떡해야 하지? 난 몰라." 귀순은 가끔 잠꼬대를 하며 밤을 지새다가 창밖에 희미한 빛이 나기 시작할 때 즈음에 이르러서야 깊이 잠이 들었다. 북국의 가을밤은 너무도 긴 탓에 그들이 밤 늦도록의 대화 끝에 잠들고 나서 늦게사 깨어난 다음날 아침에도 아직 창밖은 해가 나지 않은 채로 뿌연 여명만이 비치고 있었다. 귀순은 조금 먼저 일어났다. 일어나 보니 그녀는 자기가 발가벗은 상태라는 것에 적잖이 부끄러워 졌다. 어젯밤 노라와의 마음을 터놓는 대화 분위기에 휩쓸려 그냥 평소의 자기 내키는 대로 행동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어제 노라와 한 대화들과 몸짓 등도 아침의 맑은 기운 속에서 생각하니 몹시도 창피했다. 귀순은 얼른 침상을 나와 옆의 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빗질하고 자신의 푸른 평상복을 걸쳤다. 거울 속의 그녀는 아직 눈을 부시시하게 뜨고 있는 졸린 모습이었다. 어린 여황족의 옷은 그냥 한 원통형의 원피스이다. 몸에 꼭 맞는 옷은 금방금방 자라는 그녀의 몸에 맞지 않는다. 그리고 아직 화려한 치장이 필요할 나이가 아니므로 그녀는 체온조절을 위한 최소한의 간단한 옷만을 걸친다. 귀순은 손님을 위한 아침식사를 만들기 위해 앞치마를 둘렀다. 조금 있다 노라가 잠을 깼다. 그녀는 귀순이 먼저 일어나 아침준비를 하려 하는 것을 보고는 일어나 다가가 귀순의 팔을 잡으며 "전하가 어찌 식사준비를 하시겠어요? 제가 하겠어요." 하고 나섰다. 귀순은 살짝 웃으면서 "그럼, 한번 해보세요. 장군님." 하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노라는 곧 귀순이 하던 식사준비의 일을 대신 하려고 했다. "전하, 전자렌지는 어느 온도로 해야 하죠? 몇 분 동안 동작시켜야 하나요?" "이 전기밥솥은 어느 쪽 스위치를 눌러야 하지요?" 귀순은 곧 손을 내밀어 조리대를 잡고 말했다. "호호, 장군님은 원래 맡은 자기의 일이 있는데 이런 일을 어떻게 한단 말이에요. 내가 할 테니까 조기서 기다리세요." 귀순은 離乳를 준비한 때부터 십여 년 간 익혀진 자취솜씨로 아침식사 준비를 했다. 노라는 멋쩍게 웃으며 "황공하옵게도 전하의 후한 대접을 그냥 받을 수밖에 없겠네요." 하고는 물러서서 탁자 옆에 앉았다. "좀 싱거우실는지 모르겠어요. 지금 이유식을 먹고 있는 시기라서. 호홋." 귀순은 식사를 차려왔다. 둘은 하트형 탁자에서 정답게 아침식사를 했다. 식사 후 귀순은 커피 두 잔을 타왔다. 커피 한 잔씩을 마시면서 둘은 계속 어제 못 다한 수다를 풀었다. 대화 중에 귀순은 "참 어제 내가 좀... 정신이 없었나봐요. 혹 실례되었다면 미안해요." 하고 좀 난처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전혀 그런 건 없었는데요." 노라는 눈을 치켜 뜨고 대답했다. 귀순은 다시 멋쩍어하며 "어제 그냥 별 생각없이 한 얘기들이니까 그냥 아무렇게나 지나쳐 버리세요." 하고 살짝 수줍은 미소까지 지었다. "뭘 말씀이십니까?" "어...제. 저녁에서 밤늦게까지 한 제 얘기들이요..." "아 그 얘기요? 저는 단지 황세녀 전하의 삶은 저희와는 이토록 다르구나 하는 신기함에 귀담아 들었을 뿐이에요. 재미있었어요. 전혀 개의하지 마세요." 노라는 미안해 할 것이 조금도 없다는 말인데도 귀순은 재밌게 들었다는 말에 오히려 더욱 당황하고 부끄러워졌다. 어젯밤 늦게까지 귀순은 수다떠는 기분에 취해 자기에게 떠오르는 온갖 얘기를 다 하면서 자신의 몸에 나타나는 각종 생리현상들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설명을 해가며 밤을 보냈던 것이다. 귀순은 더욱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어... 제... 잠자리 혹 불편하지 않으셨나요?" "아뇨, 전혀. 무엇 말씀하시는 겁니까?" 노라가 되묻자 귀순은 가슴이 철렁했다. "아니... 별거 아녜요. 혹 잠을 제대로 못 주무셨나 해서..." "잘 잤어요. 황세녀 전하의 보드라운 살결을 제가 밤새도록 감촉할 수 있도록 해 주셔서 꿈결 속에서도 이제껏 지내 본 예전 어느 곳의 잠자리보다 포근함을 느낄 수 있었어요." 귀순은 얼굴이 흙빛이 되어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이윽고 바깥이 밝아졌다. 노라는 차림새를 다시 고쳐하더니 "이제 군영에 돌아갈 시간이 됐어요. 그럼 황세녀전하 편안히 쉬면서 기다리세요. 제가 다 준비를 해 올 테니까." 하며 귀순에게 절하고 문을 향했다. 귀순은 창피한 마음에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키며 노라를 전송하러 따라 나섰다. 자신의 근무지며 숙소인 군영으로 돌아가는 노라에게 귀순은 재삼 부탁했다. "동방개척을 위한 파견대상인원을 구성하세요. 잘들 달래서 갈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염려 마세요, 키션 황세녀 전하와의 동행이라면 모두들 즐거이 따라 나설 거예요. 제 부관 애스터도 당연히 저와 함께 할 것이고요." 문밖까지 온 귀순은 손을 입가에 대었다 떼며 웃는 낯으로 그녀를 전송했다. 귀순은 노라를 보내고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그녀는 잠시 탁자 옆의 의자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녀의 양 눈가에서는 두 줄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눈물은 턱을 타고 흐르다내려 그녀의 앞가슴의 옷자락을 방울방울 적셨다. 그녀는 일어나 자리를 옮겨 침대맡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흐흑... 흑. 엄마. 난 가기 싫어." 여황국 시대의 사회는 전생인류시대의 사회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단지 여성의 역할분화와 남성역할의 최소화뿐만이 아니라 이러한 모성지배사회로부터 파생된 사회 구조와 사고방식 자체가 선천의 인간사회와는 다르다. 생활과학이 충분히 발달한 이 미래사회에서 어찌해서 이 지구에는 아직 미개척 땅이 많고 이들 불모지에 대한 정확한 지식도 없었는가에 대해 의문이 생길 수가 있다. 그러나 후천개벽 이후 인류는 사회계약에 의한 통제의 개념이 없어졌다. 더 이상 힘을 바탕으로 한, 불복종자에 대한 危害의 위협에 근거한 권력통치는 없어지게 되었으며 일반 사회에서도 권력을 갖춘 조직에 의한 모든 생산 활동은 더 이상 있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아직 많은 자료와 문헌이 남아 있는 과학기술 분야도 이들 많은 이론의 실제적인 구현 및 응용을 위해서는 방대한 조직을 동원해 일을 추진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한 성격의 일을 추진하고자 하는 사고방식이 이들 여황국민들에게는 없다. 그들에게는 오직 모성에 의한 통치개념이 있을 뿐이다. 이리하여, 고도의 인력관리 및 통제술을 바탕으로 해 많은 사람들의 체계적인 합심을 유도할 필요가 있게 마련인, 복합적인 목적을 띠거나 큰 규모의 성격을 가진 첨단기술활용사업은 수행이 불가능했다. 그들은 오로지 단순한 목적으로서의 첨단 기술만을 보유할 뿐이다. 자동차, 비행기 심지어 우주선이 있다 해도 그들은 그것을 단순히 이동의 목적이나 오락용 등으로만 쓸 뿐 그것의 효과적인 활용이 가진 정보수집 능력을 체계적으로 이용해서 복잡한 성격의 목적에 이용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냥 장소이동을 빠르고 편안하게 하는 목적의 기계라던가 저기 떠있는 달에 갔다오는 기계라던가 하는 단순한 목적의 기계는 얼마든지 만들어지고 다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지구 상공을 선회하며 정찰사진을 찍어 그것들을 합성하여 정보를 수집하는 등의 복잡한 목적의 기계는 생각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생명지상주의에 근거해 비롯된 여황국의 모든 사람으로서는 인명살상의 효과적인 방법을 위해 머리를 쓰며 연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에 과학기술을 상대방을 제압하기 위한 무기로서 활용한다는 것 또한 있을 수 없다. 동방개척의 계획은 궐 밖의 일반백성들에게는 비밀로 부쳐지고 공표하지 않았다. 그들 모두의 연모의 대상인 귀순마야희고를 보낸다고 하면 어떤 혼란이 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바할라궁의 위치는 전생인류시대의 방위기준으로 보아 북위 65도에 동경 10도 부근이다. 이곳에서 배를 타고 밖으로 나갈 때는 으레 얼음에 뒤덮인 북쪽이나 동쪽의 방향은 생각하지 않고 서남쪽의 따뜻한 해수를 따라 향진하는 것이 상례였다. 이제 여지껏 가기를 꺼리던 불모의 땅이 있는 방향으로 그들은 새 삶을 찾아 떠나가게 되는 것이다. 다음날부터 귀순과 노라는 귀순의 방안에서 동방개척의 구체적인 방안을 협의하기 시작했다. "황세녀 자매님을 보좌해 장도에 오를 인원은 저의 부하들과 그들의 친구들을 모집해 약 이천명의 일사람들로 구성하기로 했습니다. 귀순 황세녀 전하와 같이 떠난다는 말을 하니 그들도 정든 이 나라를 떠나는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기뻐하며 따라주었습니다." "정말 수고했어요. 내가 뭐 별 게 있다고 그러겠어요? 다 언니가 그들을 잘 이끌어 줘 왔기 때문이죠. 그런데 새 나라를 세우려면 당연히 숫사람들도 있어야 하겠지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숫사람들은 저희들이 불러낼 수 없으니 전하께서 적정수를 폐하께 주청드려 보시는 것이 옳을까 한데요." "물론이죠. 오늘 저녁에 엄마한테 한 백 명 정도 달라고 하겠어요." "전하. 우리가 새 나라를 이루고 정착하게 될 때까지는 얼마가 걸릴지 모르는 것입니다. 臣이 살아있는 동안에 이루어질지 안 이루어질지도 모르는 것이죠. 그러므로 원정대의 기동력이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게 하기 위해 범인족의 구성원은 중장년으로부터 어린아이까지 다양한 연령층으로 구성되어야 하겠어요. 저희가 차출한 일사람들은 그렇게 구성되었사오니 숫사람들도 그렇게 구성되어야 하겠어요." "그래요. 물론 여러 연령층을 골고루 데리고 가야죠. 그런데 언니, 그런 얘기는 말아주세요. 좋은 새나라를 건설해서 언니도 행복한 여생을 즐기도록 해야지. 무슨..." 귀순은 계속해서 마치 어느 발랄한 처녀가 산에 놀러가기 전에 즐겁게 계획을 짜듯이 하며 지도를 펴놓았다. 지도에는 귀순이 사는 나라가 위치한 반도와 그 남서쪽 일부만이 나와 있을 뿐이었다. 그들 여황국 시대의 사람들로서는 이제껏 살아온 곳 이외의 땅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바 없었고 또 그럴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동방이란 실로 前人未踏의 미지의 땅일 수밖에 없다. "어떻게 갈까? 음... 어차피 대륙을 횡단하는 것이니 이렇게 육로를 통해 가는 것이 어떨까?" 귀순은 한쪽 손을 턱에 괴고 지도 위에 손가락을 그어 보이며 말했다. 둘이 더 친밀한 분위기가 되니 노라의 말투도 조금 변해 거침없이 그녀의 구상한 바를 귀순에게 말해주었다. "아녜요, 전하. 보세요. 우리 바할라궁의 남동방향에는 험준한 산맥이 가로놓여져 있잖아요? 이렇게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건너기에는 상당히 무리이거든요. 그러니, 출발 시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방법인 배를 타고 항해하기로 해요." 노라는 이미 배를 타고 남방 각국을 순회한 적이 있으므로 먼 거리를 가려면 배를 타고 가는 것이 가장 편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얼마 걸릴지 모르는 이 여행동안 생활을 해나가는데 지장이 없게끔 우리의 배들 중에서 가장 큰 것을 골라 시설을 개조하고 보강해 놓겠어요." 노라는 계속 진지하게 계획을 말했다. 마침내 약속한 그날이 왔다. 귀순마야희고는 일반 백성들의 눈을 피해 이날 새벽 어둠 속을 뚫고 일반 배를 타고 먼저의 협강을 다시 거슬러 올라갔다. 날이 밝아질까 할 무렵 그녀는 도착했다. "언니 저 다시 왔어요. 어서 배에 타세요." "원 너두. 내가 어떻게 그냥 배에 탈 수가 있니?" "아참. 죄송해요 언니." 귀순과 같이 온 궁인들은 소냐를 부축해 승선시켰다. 그리고는 곧 바할라궁으로 데리고 왔다. 오는 길에 귀순은 혹시나 자기가 밖의 눈에 띨까 안에 들어가 앉아있기만 했다. 마치 몰래 도망 나오듯이... 그녀가 뭇백성들의 흠모를 뒤로 하고 떠나 버린다는 것을 모든 이들이 알게 된다면 이어질 사태가 걱정되는 것이다. 소냐 발키리아와 이미 구성되어 그녀와 동행하게 될 동방식민원정대 모두들과의 대면이 이루어졌다. 노라와 애스터 등 식민사업을 지휘하게 될 주요 일사람들은 소냐에게 예를 취했다. "북미희여황국 창건이래 모든 여황족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우신 소냐 황세녀 전하를 보필하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흥. 예쁘기만 하면 뭘해요? 제 구실도 여태 한번 못해봤는데... 어쨌든 고마와요. 나를 위해서 그대들이 애써준다니..." 그날 저녁 이들은 같이 모여 전야제를 치렀다. 모닥불을 가운데 놓고 그들은 이 곳 고향에서의 마지막 밤을 아쉽게 보냈다. 귀순을 포함한 모두가 자신들의 노래와 춤으로 온 밤을 밝혔다. 먼 옛날에는 인간도 남녀가 서로 사랑을 했었네 사랑의 쾌락은 남자의 몫이었고 사랑의 책임은 여자의 몫이었네 사랑은 여자에게 슬픔과 아픔을 주는 것 그것은 모든 여자의 자아를 짓밟았네 사랑의 무거운 짐진 여자들 다 내게로 오라 그리하여 나 홀로 그대들의 짐을 지리라 그대 모든 여성들 이제는 자유로다 그대들의 자아는 이제 맘껏 꽃피우리다 일사람들 모두가 여황족의 이런 희생적인 부담이 없었더라면 자신들의 생이 먼 옛날의 여자들처럼 되었을 거라는 생각에 더욱 여황족에 대한 감사와 경의의 마음이 더해졌다. 그들에게 옛날 선천시대의 여성의 생활이란 생각만 해도 아찔한 것이었다. 비스듬히 누워 지켜보기만 하던 소냐도 조금씩 흥에 겨웠는지 이제까지의 냉소가 아닌 진정한 즐거운 웃음을 웃는 것 같았다. 울긋불긋 형형색색으로 타오르는 모닥불빛 앞에서의 그녀의 모습은 더욱 눈부시게 빛나, 먼저 일사람들이 그녀에게 예를 취하며 한 인삿말이 꼭 빈말만은 아님을 입증하는 듯 했다. (11) 大平原의 건국 이튿날 이들 여황족 자매와 모황과의 마지막의 만남이 될 송별식이 거행되었다. 구름이 낮게 깔리고 곧바로 비라도 올 것 같은 날 북국여황 헤다 발키리아는 황궁 앞의 벌판에서 기어이 이들을 보내야만 하는 날을 맞았다. 중앙에 단상에 자리잡은 그녀의 피부는 희다기보다는 반투명이라고 해야 옳았다. 불그스레한 빛이 감도는 그녀의 몸과 황금빛의 머리칼 그리고 푸르게 번뜩이는 큰 눈은 흡사 빨강, 파랑, 노랑의 삼원색의 조화를 보는 양 신비스러웠다. 송별식에서 두 황세녀는 이제 모황과의 마지막 포옹을 하고 나면 떠나게 된다. 소냐 발키리아는 이미 다 자란 여황족의 몸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녀의 어머니에게 다가가기에는 매우 힘들었다. 일사람들은 그녀가 탄 수레를 최대한 모황의 위치에 가까이 해 놓고 사이에 푹신한 카펫을 깔아 가까이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소냐는 모황에게 어렵사리 다가갔다. 두 여인은 서로 부둥켜안았다. 사랑의 한(恨)을 품고 사는 이 여인들이, 더군다나 그네들의 긴 일생을 통해서도 아마도 다시는 못 만나게 될 이별을 하는 장면. 굳이 말 안해도 너무도 당연히 상상될 모습을 일일이 묘사한다는 것은 필요 이상의 청승일는지 모르겠다. 귀순도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품에 안겨보고 나서 짐짓 의연하게 이별의 예를 취했다. 마침내 출발하기 위해 그들은 배에 올라탔다. 소냐는 여황전용안락수레를 타고 승선되었다. "사랑스런 내 딸들아 부디 행복하여라." 철혈 여황 헤다도 자신의 분신인 두 자매를 한꺼번에 보낸다는 사실에는 서운한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다. 귀순과는 근래에 자주 만남을 통해 충분한 이해가 서로 있어 왔지만 소냐와는 이미 몇십 년 동안을 반목하며 지내왔었다. 이제 그 반목의 원인도 풀어졌으나 결코 행복이 보장되었다고는 볼 수 없는 동방식민사업에 보내게 되었으니 그렇게 마음이 후련할 수도 없었다. 다만 자신이 편애한다고 소냐가 알고 있는 귀순을 같이 보내니 이에 대해서는 이젠 오해가 완전히 풀리리라고 생각되었다. 더이상 이별의 장면묘사는 말자. 거대한 용머리를 한 배, 이름 붙이자면 거룡선(巨龍船)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배는 항구를 뒷걸음쳐 빠져나가더니, 뱃머리를 돌려 전에는 한번도 가지 않았던 동북의 방향으로 시푸른 바닷물을 무심히 가르며 나아갔다. 북미희여황국의 여황 헤다 발키리아 13세 즉위 475년, 이제껏 한 번도 가지 않았던 새로운 땅을 향해 새 여황국 개척의 장도(長途)에 그들은 오른다. 배는 육지를 오른쪽에 끼고서 계속 동쪽을 향해 나아갔다. 귀순마야희고는 나날의 대부분을 뱃머리와 망루에서만 보냈다. 그녀는 줄곧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어서 빨리 이 배가 정박해 삶의 터전을 이룰 새 땅을 찾았다. 동토(凍土)의 해안을 따라 가는 뱃길의 왼쪽에는 얼음으로 덮인 망망대해(茫茫大海)만이 보일 뿐이었다. 배는 육지를 끼고 동북방향으로 계속 나아갔다. 갈수록 바다 위 군데군데 희묽게 떠다니는 얼음들은 늘어갔다. "쾅, 콰르르릉, 우르르" 거대한 얼음들은 뱃전에 부딪쳐 깨어지면서 마치 바닷짐승들이 서로 성내어 으르렁대며 울부짖는 소리로 들렸다. 배안에 있는 어린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하지만 그 소리는 갈수록 더해가기만 했다. "무서워요, 우리 배 주위를 바닷짐승들이 습격하려고 포위해 있는 게 아녜요?" "아니란다. 이건 단지 바깥에 떠다니는 빙산들이 우리 배와 부딪쳐 깨지면서 나는 소리란다. 곧 잠잠해 질 테니 걱정 말고 잊으려무나." 달래는 성인 일사람들도 이제까지 자신들이 겪지 못했던 상황에 마음속으로 두려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귀순은 바깥에서 빙산의 흐름을 관찰하며 되도록 이들을 피해 나가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바다를 가득 메운 빙산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아, 여기가 지도의 끝이구나." 귀순은 손에 들었던 지도를 놓았다. 지도에는 이 이상 동쪽의 해안에 대해 그려 있지가 않았다. 이제는 그녀가 들었던 선사전설(先史傳說)의 어렴풋한 대강만을 근거로 뱃길을 인도해야 한다. 길을 잃지 않으려면 보다 육지에 근접한 채로 가야 했다. 검은 바위들이 불쑥불쑥 솟아있는 오른편의 해안을 따라 진행은 계속되었다. 배에 부딪치는 얼음들은 이제 좀 뜸해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실제의 위험이 도사리는 것이다. 귀순은 배가 혹시나 있을 암초를 피해가도록 앞길을 보다 철저히 살폈다. 가다가 귀순은 갑자기 크게 소리질렀다. "앗, 조심해! 뱃길을 왼쪽으로 돌려!" "왜입니까? 아무것도 없는데요..." 일사람들은 일단 그녀의 지시대로 조치는 하면서도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반사음이 그대로 들려, 저 앞 물밑에 암초가 있어." 귀순은 배가 나아가는 소리가 물 속에서 반사되어 나오는 소리로 물밑의 이물체(異物體) 존재여부를 청진(聽診)했다. 이상이 없을 때 배의 진동소리는 바닷물 속으로 퍼져 나가고 미미한 잔파(殘波)만이 되돌아오지만 물 속 이물체 존재 시에는 반사되어 물위로 올라와 그녀의 귀에 웅웅 울리면서 들린다. 날이 어두워졌다. 어서 육지를 찾아 정박해야 하나 어두운 밤의 항해는 지극히 위험하므로 배는 항해를 쉬기로 했다. 또한 지도에 없는 뱃길을 가는데 있어서 귀순이 앞길을 인도해 주지 않으면 곤란한 실정이므로 그녀의 쉼과 함께 배도 쉬어야 했다. 다음날 아침 준비를 마치고 배는 다시 전진했다. 며칠이고 항해는 계속되었으나 귀순은 지칠 줄을 몰랐다. 순항이 계속되면서 일행 중 상당수가 갑판 위에 나와 전에 못 보던 얼음바다를 구경하고 있는 때였다. "아앗, 저기." 모두들 크게 놀라 소리질렀다. 저 앞에 시꺼먼 먹구름이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곧 강풍이 불어왔다. 마스트에 걸려있는 모든 깃발은 내려졌다. "후드득, 푹, 푹" 먹구름은 온 하늘을 뒤덮더니 손가락 굵기 만한 빗줄기를 사정없이 사선(斜線)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았다. 이들이 달리 대처할 방도는 없었다. 모두들 갑판 아래로 대피하고 배의 운행을 정지시켰다. 그리고는 어서 폭풍우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춰얼썩, 푸우, 콰당탕" 풍랑은 거대한 갈쿠리 모양으로 높게 일더니 갑판 위에 바윗돌같은 얼음덩이들을 쏟아부었다. 모두들 미리 대피하지 않았다면 큰 위험을 초래할 뻔했다. 좀처럼 폭풍우는 그칠 줄을 몰랐다. 이들과 같이 안의 선실로 대피해 있는 귀순은 자기가 이 때 어찌 할 도리가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어찌하나, 이 세계(世界)에는 나보다 더 사람들을 위해서 해 줄 능력을 가진 그 누군가가 있을 것만도 같은데 그 모습은 나타난 적이 없으니..." 모두들 흔들리는 선실 안에 두려움과 초조함에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귀순은 작심한 듯 일어났다. 그리고는 갑판 위로 향했다. "키션 황세녀 전하 어딜 가세요?" 옆의 노라가 묻자 귀순은 "잠시 더 침착하게 기다리고 있도록 해두세요." 하고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갑판위로 올라갔다. 온통 먹구름으로 뒤덮인 하늘 아래 그녀는 두 팔을 위로 들어 천천히 두리번거리며 누군가 자기와 대화할 생명의 기(氣)를 찾았다. 이윽고 그녀는 멀리서 다가오는 희미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선수(船首)를 향해 서있는 그녀가 왼팔을 쭉 벌려 조금 앞으로 가리켜지는 방향으로부터 였다. "배를 이쪽 방향으로 전진시켜요." 어찌할 바 모르던 조타실에서는 앞 유리창너머 그녀의 손짓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뱃머리를 돌렸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먹구름과 폭풍우 속에서 배는 전속력으로 나아갔다. 다시 떠다니는 얼음의 양은 늘어나 뱃전에 사정없이 부딪치고 깨어지니 배 안의 사람들은 예전보다 더 심한 굉음(轟音) 속에서 떨어야 했다. 그러다가 한 이십 분 정도를 갔을까. 비바람은 급작스레 옅어지더니 앞의 시야는 트이기 시작했다. 앞에는 뽀얀 물안개만이 남았다. 바람은 알맞게 불었다. 이제 풍랑지역을 빠져나온 그들은 다시 항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여러 일사람들은 기쁜 마음으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앞에 선 귀순의 뒷모습을 흠모의 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대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회색구름의 사이틈새로 옅게 내리치는 햇살아래 그녀는 경건히 하늘을 올려보았다. 조금 있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커다란 알바트로스 새 한 마리가 나타나 배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녀가 미소지으며 왼팔을 뻗자 그 새는 긴 날개를 퍼덕이며 그녀의 왼쪽 팔목 위에 와 앉았다. 이제는 그들이 살던 나라로부터 상당히 벗어났다. 상륙하기 좋을 만한 육지가 나타나면 배를 정박시키고 새 땅을 찾아야 할 것이다. 다시 순풍(順風)을 따라 얼마간의 항해를 더하니 육지는 더이상 동북으로 뻗어있지 않았다. 진행방향을 해안선을 따라 동남으로 꺾어 가다가 귀순은 해변에 이끼풀잎 무성한, 사람이 살기에 무리가 없을 듯한 땅을 발견했다. 귀순은 기쁨에 크게 외쳤다. "저기다! 바로 저기에 우리의 배를 정박시키자! 그리고 그 이남의 땅을 우리의 영토로, 우리의 삶의 터전으로 하자!" 대륙 맨 북단의 땅이 식물이 자라나는 곳이라면 그 곳으로부터의 이남은 생명이 살기에 부적합하지 않으리라는 판단이었다. 배는 속도를 늦춰 해안 쪽으로 다가갔다. 웅웅거리는 배의 진동소리는 점점 더 낮아져, 귀순의 귀에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배의 전기동력(電氣動力)은 꺼지고 마지막 남은 관성의 힘으로 거대한 배는 얕은 대륙붕(大陸棚) 가를 미끄러졌다. 물밑의 모래흙더미가 날선 배 밑바닥에 파헤쳐지면서, 좌우현(左右舷)의 사면(斜面)을 따라 물위에까지 튀어올랐다. 거조(巨鳥)가 착륙하며 양날개를 퍼덕이듯 배는 누런 흙물먼지를 양편으로 뿜어대며 서서히 정지했다. 마침내 거대한 배는 육지의 기슭에 박혀 완전히 멈추었다. 거룡선의 닻은 내려져 훗날의 숱한 사연을 잉태한 이 배는 길지 않은 항해를 마치고 이 곳에 정박했다. 무거운 쇳소리를 내면서 거룡선의 옆구리에 있는 상하개폐식의 문이 열렸다. 여황전용안락수레를 비롯한 탐험용 차들이 배에서 내려졌다. "어마, 벌써 다 왔니? 여기가 어디야?" 차내의 자리에서 세상모르고 자고 있던 소냐는 부시시 눈을 뜨며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이제 육지로 온 것이에요. 여기서부터 우리가 새로 나라를 세우기에 알맞는 땅을 다시 찾아야 하는 거예요." 어수선한 가운데서 그녀 주변을 지키고 있던 일사람들은 말해주었다. "그래? 그럼 더 있어야겠네? 있다가 일 있으면 깨워 줘." "아니 그래도 지금부터는 우리의 영토가 될 땅이니까 좀 보시면서 가는 게 좋지 않아요?" "일없어, 키션에게 얘기해봐." 소냐는 다시 눈을 붙였다. 귀순은 이 때 해안의 높은 바위산에 몇몇 일사람들과 같이 올라 전망을 바라보았다. "저기 너머는 아담한 분지가 보이는데 거기에는 한 이삼십 명이 사는 마을을 이룰 수 있을 거야. 이 곳은 앞으로 우리가 세울 나라의 바다 진출을 위한 항구로 쓰기에 알맞을 것 같거든. 이렇게 해서 여기서부터 앞으로 우리가 발 딛는 곳을 모두 우리의 영토로 하면 좋을 거야." 배에 있는 미리 마련된 재료와 현지에서 구한 통나무 등을 이용해 터를 닦고 집들을 지었다. 그들은 전생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 단기간에 완벽에 가까운 공사를 마쳤다. 마을 건설이 이루어지는 대로 여기에 남는 일부 일사람들을 제외한 모두는 이백여 대의 탐험용 차에 분승해 출발했다. 역시 귀순의 예상대로 사람이 살기에 큰 무리가 없는 땅은 계속 펼쳐져 있었다. 가다가 집을 짓고 살만한 곳이 나타나면 부락을 만들어 삼사십명의 일사람들을 정착시켜 그들의 삶을 새로 시작하게 하고 나머지는 더 나은 곳을 찾아 다시 남쪽으로 나아가는 방식으로 그들은 그들의 땅을 넓혀갔다. 가는 길에는 물론 어려움도 적지 않았다. 이제까지 그들의 고향 나라에서는 겪지 못했던 험한 지형으로 인해 여러 문제가 생길 때마다 초녀 귀순은 자신이 가진 힘을 다해 해결해 주었다. 또한 전생인류의 격감 후에 널리 번성된 사나운 짐승들을 접하게 되었을 때에도 그녀의 역할은 매우 컸다. 그들의 전진하는 앞길이 고르지 못해 일사람 십여 명이 앞에서 길 내는 작업을 할 때였다. "으르렁, 어흥..." 저 앞에 암호랑이 한 마리와 반쯤 자란 새끼 두 마리가 일행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네들의 삶의 터전을 훼손하는 이들 일행을 적의(敵意)를 가지고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호랑이들은 그들의 작업장 근처를 오가며 습격의 기회를 엿보는 것처럼 보여 여간 위협이 되고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자 곧 귀순이 나와 어미 호랑이에게 다가갔다. 귀순은 웃는 낯으로 무언가 얘기를 걸 듯이 하면서 그 짐승을 바라보았다. 한 동안 귀순의 자애로운 눈길과의 눈싸움이 이루어지고 난 후에 어미 호랑이는 귀순에게로 살금살금 다가와 양팔을 내벌리고 있는 그녀의 품에 안겼다. 새끼들도 곧 뒤따라 옆에 붙었다. 귀순은 그네들에게 마음의 전달을 했다. '우린 이곳을 단지 그냥 지나가려는 것 뿐이야. 절대 너희들이 살 곳을 해치지는 않는단다.' 그녀 앞에서는 흉폭한 호랑이도 조금 큰 애완용 고양이에 불과했다. 호랑이들은 귀순이 주는 약간의 먹을 것을 물고는 곧 옆의 숲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임시거처에 천막을 치고 거하고 있을 때였다. "크르르르..." 불곰 대여섯 마리가 먹을 것이 있나 둘러보는 듯 구석에 있는 천막 주위를 맴돌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안의 어린이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공포에 떨 수밖에 없었다. 귀순은 곧 그리로 갔다. 그리고는 먹을 것을 주며 그중 가장 큰 어미곰을 가까이 오게 했다. 귀순은 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배고프면 여기 따로 너희들을 위해 먹을 것을 줄 것이니 앞으로는 아무 때나 무리로 와서 사람들을 무섭게 하지 말아라. 오늘은 이 정도만 받고 돌아가거라.' 했다. 그녀에게는 사나운 불곰이라 해도 그저 조금 큰 살아있는 장난감 곰인형일 뿐이었다. 곰들은 식민원정대 일행이 그곳에 머무를 동안 배고플 때마다 귀순이 지정해 놓은 식사통에 와서 먹고 귀순이 가까이 있으면 그녀에게 가서 재롱을 부렸다. 이 틈에 작은 새끼곰들은 호기심 때문에 모인 어린 일사람들의 친구가 되기도 했다. 떠날 때가 되어 사람들과 곰들이 헤어질 때에는 곰들도 못내 서운한 듯 울어대었다. 개중에는 귀순의 자애로운 눈길만으로는 다스리지 못하는 짐승들도 있어서 귀순은 강제적인 방법으로 이들을 퇴치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한때 인간사회에 유행했던 공상오락물들을 통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여황 귀순마야희고를 알기 위한 이야기의 주제가 되지 않으니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강을 건너고 호수를 비껴가면서 그들은 그들의 삶의 터전을 계속해서 넓혀갔다. 강가에서 상당기간을 생활하다가 일부 남아 생활할 사람들의 정착준비가 완료되면 나머지는 뗏목 등을 만들어 하나하나 건너는 방식으로 이동했다. 그리고는 다시 새로운 식민지를 찾아 나아갔다. 고국 출발로부터 5년 정도가 지난 때에 이르러 마침내 그들은 한층 더 인간이 살기에 적합하고 너른 평원을 발견했다. 비록 고향 바할라궁이 있는 곳의 기후보다 한결 춥게 느껴지지만 기름진 광활한 대지는 그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도중에 정착하지 않고 계속 여황족 자매를 따라 온 천여 명의 일사람들은 환호했다. "드디어 찾았도다. 여기서 우리의 새로운 여황국을 건설하자!" "이곳이야말로 우리의 수도로서 손색이 없는 곳이다." "이제 이 곳에 새워질 나라는 북미희여황국보다 훨씬 더 크고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다." "이제는 우리의 족속을 늘리기 위해서 종자분양 따위를 할 필요도 없다. 그냥 이 넓은 땅에서 우리의 족속을 마음껏 늘리자." 여황족 자매와 같이한 모든 범인족 일동은 이제 그들의 고생도 끝나고 한층 더 강력한 나라의 건설의 기회가 왔다고 기쁨에 충천했다. 소냐는 모두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더이상 지체할 필요가 없다. 곧 수정식을 거행해 우리의 새 백성들을 낳고 이 곳에 정착하자."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는 이 말에 곧바로 모든 일사람들은 정착 준비를 했다. 이제까지 유목민 마냥 살아왔던 그들도 이제 제대로 갖추어진 성곽 등을 지어 어엿한 나라를 세우려는 것이다. 북국여황 헤다 발키리아13세 즉위 480년, 황세녀 소냐 발키리아14세는 오랜 세월 동안의 맺힌 응어리를 풀고 드디어 자신의 새로운 나라를 세워 가지게 되었다. 나라 이름은 이제까지 실타래를 풀듯이 오는 길에 백성들을 놓아 살게 했다 해서 라사여황국(羅絲女皇國)이라 불리게 되었다. 새로운 황궁의 건립작업도 시작되었다. 주변의 추운 환경을 극복하는 느낌을 주게 탑의 꼭대기와 지붕들은 모두 흡사 촛불이 울긋불긋한 불꽃을 내면서 타오르는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수정식과 신생아보육을 위한 시설도 만들어 세우는 등 건국을 위한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새로이 이름한 귀순마야희고의 언니 소냐 프레이아키에프 1세는 이제 대륙서북의 광활한 평원의 주인이 되었다. 이 때쯤에 귀순은 이제까지의 험한 장정(長程)에서의 숱한 일을 거치는 동안 옷은 거의 찢겨져 있고 흡사 야성녀(野性女)라는 말이 어울리는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그녀도 이제는 좀 쉬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 새 여황국을 세울 모든 여건이 되어 있는데 한 나라에 두 여황이 있을 수는 없다. 즐거이 새 수도건설에 매진하고 있는 뭇 일사람들과 이를 흐뭇하게 지켜보는 소냐의 사이에 서 있는 귀순은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소냐는 멍하니 서 있는 귀순에게 말했다. "키션, 정말 수고 많이 했어. 이렇게 좋고 넓은 땅이 있는 줄 왜 진작 알지 못했는지... 그런데 넌 아직 어리잖아? 아직도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잖아? 여기 오니 땅의 끝이 안보이네. 너는 더 넓고 큰 땅을 다스리렴." 귀순은 자신이 더 남아있을 이유가 없는 분위기를 느꼈다. 데리고 온 숫사람들도 여황용 안락수레에 고이 누워 몸 가꾸기만을 해 와서 여인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언니 소냐의 주위에만 모였다. 물론 아직 여황족의 성년은 조금 모자라지만 그래도 풋풋한 소녀의 모습을 좋아하는 일부의 취향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인데 이미 거친 야성녀의 모습을 한 자신에게는 아무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일사람들은 그 동안의 지친 여행을 끝내고 정착생활을 준비하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언니, 알겠어요. 나는 더 좋은 땅을 찾아 동쪽으로 계속 나아가도록 할게요." 이들이 정착한 뒤 얼마 쉬지도 않은 상태인데 귀순은 다시 길을 떠나야만 했다. "나와 함께 동쪽으로 더 나아가 보다 따뜻하고 살기 좋은 곳을 찾을 사람은 없어요?" 귀순은 사람들이 모인 기회를 이용해 이렇게 말을 했다. 그러나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제 비로소 안락한 새 삶을 시작하려는 모두에게 또다시 먼길을 밟기를 권하는 것은 호소력이 없었다. 언니 소냐는 말했다. "적어도 숫사람 열 명과 일사람 이백 명은 함께 가도록 하라." 그러나 역시 선뜻 나서는 자가 없었다. 소냐는 고개를 들어 귀순과 그녀의 평소의 가까운 자들을 바라보면서 "같이 가려는 사람이 통 없는데... 어떡하지?" 하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옆에 자리하고 있었던 지도부에서 몇 사람이 나섰다. "그냥 부르실 필요 없습니다. 저희들이 사람을 차출해 데리고 가겠습니다." 황세녀 시절부터 그녀를 흠모해 온 대장군 노라와 부관 애스터 등이 동행할 결심을 밝혔다. 소냐는 하필이면 보내버리고 싶은 일부 열등인간들이 안가고 여지껏 중추적 역할을 했던 그들이 나서나 했지마는 그것 마저 막을 수는 없었다. 아니 달리 생각하면 그들도 이제는 늙어 더이상 큰 쓰임은 없을 것 같았다. "좋소. 그대들의 충정(忠情)은 가히 전 일사람들의 모범이 될 만 하오." 소냐는 흔쾌히 승낙해 동행시켰다. 그들과 그들의 동료를 포함해 모두 열 명의 일사람들이 자진해서 귀순과 함께 가기로 했다. 그리고 나머지의 숫사람과 일사람들은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린아이들 중에서 반강제로 차출되었다. "얼마 걸릴 지 모르는 일이니 장기적인 안목으로 인원구성을 해야 한단다. 그러니 어린애들을 고르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야." 소냐는 귀순에게 말했다. 그 대신 장정을 위한 여행의 장비는 충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의 식민원정대 모두를 위해 있는 장비를 거의 다 필요에 따라 쓸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언니, 부디 행복하게 살아야 해요." 귀순도 여황전용안락수레에 타서 비록 어린아이들이지만 일사람들의 호위를 받으며 출발했다. 그녀의 일행은 이제부터 다시 동쪽으로 동쪽으로 알지 못하는 길을 계속 나아가며 새로운 땅을 찾아 기약 없는 旅程을 밟아야 한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그녀는 몸이 자기 뜻대로 움직이기 어려워지는 것을 느꼈다. 오랫동안 서 있으면 머리가 어지러워 졌으며 자다가 자리를 일어날 때에도 얼른 벌떡 일어나 지지가 않았다. 이제 이전보다 더 험한 여로가 계속될지도 모르는데 늙은이와 어린이들로만 구성된 동행자만을 데리고 어찌해야 하나. 귀순마야희고는 앞이 캄캄했다. <하권으로 계속>